패션칼럼 2015-03-24

[리뷰] 디자이너 김수진의 한국적 정서가 스며든 혼의그릇, 그리고 순수한 소녀의 기도

디자이너 김수진의 2015 F/W 소울팟스튜디오 컬렉션은 도시의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을 시작점으로 삶의 향기가 캣워크를 맴돌았다. 서울 시리즈 3탄인 'IN SEOUL'을 본 관객들은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좌절 속에서 어린 소녀의 파랑색 기도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2015 가을/겨울 서을 패션 위크는 어느새 반환점을 돌았다. 이번 시즌 역시 새로움과 감동의 캣워크는 패션이라는 의미 그 이상의 삶의 방향타를 제시한다. 패션쇼는 단지 옷을 보여주는 이벤트가 아니다. 그 안에는 디자이너가 세상을 바로 보는 시각과 사람을 바라 보는 애증이 섞여있다. 그냥 옷만 전시하는 것이라면 굳이 디자이너가 밤을 지새며 산고의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트렁크 쇼 개념으로 옷만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20년 넘게 국내외 컬렉션을 취재해온 필자에게 패션쇼는 디자이너의 모든 것. 즉 에브리씽이었다. 패션쇼에 나온 의상을 두고 상업적이냐 예술적이냐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면 매장에 옷이 걸릴 것이고 사느냐 마느냐의 고객 갈등만이 있을 뿐이다. 쇼핑의 본질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다. 따라서 패션쇼는 쇼핑의 본질로 볼 것이 아니라 메시지로 봐야한다. 적어도 패션쇼를 보고 작가적 시점의 디자이너 감성을 캐치했다면 당신은 진정한 패셔니스타이자 문화인이다. 패션은 환경과 역사라는 두 가지 축으로 돌아가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자 현재에 대한 반성이자 과거에 대한 오마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 김수진의 패션쇼는 늘 가슴 뻑뻑한 그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패션 콘텐츠의 파워가 엿보인다. 그냥 옷으로 보면 15분의 시간은 15시간처럼 지루하고 따분하다. 하지만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여운은 15시간을 넘어 15년으로 연장된다. 그것이 헤리티지 정신이다. 혼이 없는 패션쇼는 그저 품평회일 뿐이다. 하지만 혼이 담긴 패션쇼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영화를 보면서 나오는 눈물만큼이나 감동적인 패션쇼도 많다. 그것이 바로 패션의 힘이자 감동이자 디자이너의 사명이다.

 


필자가 <바자> 패션 에디터로 재직하던 시절, 앙드레김 패션쇼를 많이 취재했었다. 그래서 그의 패션쇼 스토리텔링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 한 때는 젊은 에디터의 근거 없는 객기로 광대패의 잘 짜여진 연극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취재 중 우연히 꽃다발을 들고 거금(?)의 티켓을 사서 쇼장을 찾은 50대 주부의 말없는 눈물을 목격했다. 그녀는 필자에게 말했다. 비록 몸매 때문에 앙드레 김 옷을 입을 수 없지만 패션쇼에서 보여주는 '여성을 공주로 만드는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깨우쳐 준다고 말했다. 참고로 무뚝뚝한 남편과 30년동안 누구 엄마와 누구 아내로 살면서 못 느꼈던 자신의 정체성을 앙드레김 패션쇼를 보면서 비로소 느꼈다고 한다. 매장에 걸려있는 옷을 보고 느끼지 못했던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은 패션쇼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이자 정신이다.

 

지난 시즌 김수진의 소울팟 스튜디오 컬렉션은 필자에게 영혼이 치유되는 감동을 주었다. 베이지, 그레이, 올리브 그린 등 차분한 뉴트럴 컬러를 사용해 마치 대도시 서울의 고요한 아침 같은 분위기를 보면서 20년 넘게 타지 생활을 해온 강원도 촌놈이 가진 탐욕의 도시 '서울'에 대한 나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또한 한복에서 모티브를 얻은 소재와 재단을 세련되게 재해석한 아이디어가 서구적인 테일러링에 중독되어 있던 나의 조선 사나이적인 고루한 사고의 비겁함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서울 시민들의 바쁜 움직임과 뉴스 화면의 사운드를 교차시킨 영상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고 이내 단정한 로우 포니테일을 한 모델이 무대 위에 올라왔고, 미래적인 홀로그래픽 소재가 돋보이는 재킷에 이어 한복 고유의 은은한 광택감을 지닌 옷들이 등장했을 때는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 찾기가 시작되었다. 비록 저고리나 두루마기 같은 전형적인 아이템은 없었지만 은근한 멋이 느껴지는 소재와 조화로운 라인을 재료로 모던미를 가미해 누가 봐도 한국적인 오늘날 서울의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래 맞아 나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 일부분인데 왜 늘 콤플렉스를 가지고 기자 생활을 했을까를 고민했다.



 

장인 정신과 시적인 혁신, 복합성을 내포한 소울팟 스튜디오의 비전은 깊이 있는 주관과 예술성이다. 그렇다고 입을 수 없는 관상용 오브제는 아니다. 아트와 커머셜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여우같은 영리함은 균형을 찾아내는 그녀만의 노하우이자 생존 방식이다. 무에서 유가 나오듯 비전공이라서 더 무궁무진한 발상의 전환은 늘 멀리 간 듯 보이지만 결국 패션적 현실과 타협한다. 그래서 소비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그녀의 진심은 고객들에게 진실이라는 레테르를 선물한다.

 

이번 컬렉션으로 어느새 세 시즌 째를 맞은 '서울프로젝트'는 정치 권력적인 손짓을 도시의 강압으로 실어내는 '이념'이 아닌, 도시의 '일성'에 주목한다. 서울 프로젝트 시즌 1에서는 '서울 다시 긋다'를 통해 어제와 내일 사이의 우리의 삶을 조명했고, 시즌 2에서는 '액티브 캄'을 통해 서울의 정체성에 대한 아이콘 작업을 해오면서 소울팟 스튜디오만의 네이티브 아이덴티티로 철학적 사유의 현실적 패션 해석이라는 근사한 족적을 남겼다. 즉 사유를 현실로 끌어오는 균형을 잡으며 의미와 실질이라는 지표를 완성해 가고 있다.

 

도시를 이루는 근간은 그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소울팟 스튜디오는 '서울 프로젝트'가 컬렉션 팀의 프레임에서 출발한 테마들과 '실제 서울을 살아가는, 혹은 서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함께 하게 될 때 진정한 로컬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이번 컬렉션을 위해 팬 페이지로 사연을 공모한 행위는 디지털 시대에 반기를 든 아날로그적 소통의 또 다른 모습이다.



 

5천만 인구 중 1천만이 모여 있는 수도 서울은 기형적인 만큼 한 국가의 모든 것이 집약된 도시다. 그 도시로 60년대 개발 공화국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 출발을 위해 서울로, 서울로 입성했다. 더 나아가 서울이라는 모티프는 지역적 특성이나 대학 뿐 아니라 기득권이라는 권력을 은유한다. '인 서울'은 서울로 향하는, 서울에 도착한, 서울을 살아내는 그러나 서울로 태어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꿈꾸는 드라마이자 눈물겨운 현실이다. 어쩌면 판타지와 현실이 교차하는 패션과 서울이라는 도시는 묘한 동질감을 가진 이란성 쌍둥이 같다는 느낌이다.

 

이번 컬렉션의 스토리텔링은 총 6개의 쇼트로 구성되었다. 순수의 꿈으로 시작됐던 발걸음은 기나긴 밤을 지나, 서울이라는 의미에 도착하지만 도시의 무감각한 피로와 끝나지 않을 또 다른 벽 앞에 그저 수긍하는 삶이다. 그 지점에서 서울은 지역의 경계가 아닌 자본의 경계, 권력의 경계가 된다. 그 경계의 안팎을 바라보며 소울팟 스튜디오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지역의 경계가 아님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여전히 그 모두를 지각과 각성이라는 장치를 통해 보듬는다. "당신의 가슴 속에 있던 파란 조각은 단지 서울이 아니라 꿈이었다."라고.

 

소울팟 스튜디오는 이번 시즌 캐시미어 알파카 울, 앙고라와 같은 우아한 소재에 딥 블루, 군청색, 옅은 녹색 컬러를 배치하여 모던하고 미니멀한 룩을 다수 선보였다. 특히 동양적인 실루엣을 담은 심플한 의상들은 그 옷이 그 옷 같은 요즘 패션쇼에서 분명한 아이덴티티와 자존심으로 우러났다. 패션쇼의 마지막은 어린이 모델이 등장해 영화 같은 연출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군데 군데 훌적거리는 관객들을 보면서 필자는 생각한다. 세월호 아이들이 떠올랐을까? 아니면 어린 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험난한 미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어쨌든 상관없다. 그 관객은 소울팟 스튜디오의 패션쇼적 메시지를 통해 스스로 정화되었을테니까 말이다.

 


디자이너 김수진의 패션쇼를 보노라면 신에게 육체와 영혼을 바치는 굿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늘 영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패션을 입는 것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에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은 육감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이고, 세속적이기 보다는 종교적이다. 그래서 달콤한 컨템포러리에 중독된 관객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감동의 지속성은 그 이상이다.

 

존재에 대한 인식 없는 남루한 컬렉션은 정체성 없는 허구이자 팥소 없는 찐빵과 같다. 포커페이스는 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도 연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과 네러티브가 필요하다. 영혼을 담는 그릇에 투영된 서울은 오늘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상이 과거가 된다. 시간성과 역사성, 존재성이 어우러진 소울팟 스튜디오의 고민은 패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다. 나는 누구인가?

 

필자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시절, 흑백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도 않는 도서관 파 현실 도피자를 우리는회색 인간이라고 불렀다. 회색 인간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흑백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가 많지만 존재감은 미비했다. 회색 인간들은 행동하지 않고 스스로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패션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흑이든 백이든 색깔이 분명했던 디자이너가 어느 순간 그레이 컨템포러리와 결탁하는 순간 침잠하는 파랑새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 김수진은 흑과 백을 오가는 줏대있는 디자이너다. 회색이 주는 달콤함 역시 뱉어낼 줄 아는 그녀만의 아이덴티티가 아름답다. 이제 어느새 봄이 왔다. 마지막으로 영혼을 닮은 쇼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디자이너에게 김춘수의 시로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글 유재부 패션평론가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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