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패션 | 2014-05-08 |
레전드 '찰스 제임스 쿠튀르' 부활한다
50년대 유럽에 크리스찬 디올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찰스 제임스가 있었다. 적어도 미국인들 입에서는 그렇다. 이 전설적인 브랜드 찰스 제임스 쿠튀르 부활에 미국 미디어계의 거부 하비 웨인스탄인과 그의 아내 조지나 채프만이 발 벗고 나섰다.
세계 패션사에서 전설로 남아있던 쿠튀르 디자이너가 곧 부활할 예정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미국의 전설적인 쿠튀리에로 불리는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다. 올해 메트로폴리탄 전시를 통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찰스 제임스는 20세기 전반기에 누렸던 전성기를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재현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지난 화요일 미디어계의 거물 하비 웨인스타인(사진 왼쪽)은 디자이너의 가족들과 브랜드 부활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찰스 제임스 쿠튀르 브랜드 부활은 웨이스타인의 부인이자 마르케샤 브랜드의 공동 디자이너인 배우 출신 조지나 채프만(사진 오른쪽)이 이끌어 갈 것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처음 전한 인터넷 미디어 <페이지 식스>에 따르면 하비 웨인스타인은 올해 초 부터 브랜드 부활을 위해 찰스 제임스 측과 접촉해 결국 독점으로 미국 최초의 쿠틔르 하우스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유럽에서 바이어스 재단법의 창시한 마들렌 비노에나 초현실주의 디자이너 엘사 스카아파렐리가 부활하는 것에 자극받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는 미국 최초의 쿠티리에로 1906년 6월 18일 영국에서 태이너 군무원이자 강사였던 아버지 랄프 어네스트 하워즈 제임스와 시카고의 명문 출신 어머니 루이스 엔더스 브레사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랐다. 패션 사진자인 세실 비튼이 고등학교 동창으로 세실 비튼과는 <보그>지를 통해 많은 작업을 함께했다.
1924년 부모의 권유로 시카고에서 건축 디자인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주된 업무는 스케치나 패턴 스카프를 파는 것이었다. 일에 흥미가 없던 그는 결국 해고되었고 신문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1926년 어머니 친구들의 지원 아래 시카고 노스 스테이트 스트리트에 '찰스 부쉐론'이라는 모자 샵을 오픈하고 2년 뒤에는 적은 투자금을 가지고 롱 아일랜드에 진출하게 되는데 다이애나 브릴랜드 등과 같은 유명 인사들의 주목을 받으며 뉴욕의 퀸스에 작업실을 둘 정도로 성공해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다.
1929년에 런던으로 돌아온 찰스 제임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살롱 'E 하워즈 제임스'를 오픈하지만 바로 문을 닫았다. 이듬해 그는 자신만의 디자인을 백화점과 뉴욕, 런던, 파리의 제조업자들(당시 이들은 그의 디자인을 대량으로 카피해서 판매한다)에게 판매를 시작한다. 이들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인지도를 얻은 그는 향후 10년간 유럽과 미국의 오가며 상류층을 상대로 자신의 의상을 판매한다. 그러나 앞서 계약한 제조업자들과의 계약 등을 이유로 그의 독점적인, 한정적인 디자인이 대량으로 시장에 돌았다.
1933년 런던에 다시 매장을 오픈했고 1929년에 첫 선을 보인 택시 드레스에 지퍼를 단 형태로 재해석하여 선보인 디자인이 히트를 치면서 스포츠 웨어 컬렉션은 '로버츠 드레시즈'와 함께 론칭하게 된다. 1934년에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미국 상류층을 상대로 한 쿠튀르 컬렉션을 시카고 백화점 '마르셀필즈'에 선보이게 되고 무대 의상 디자인도 맡게 된다.
1936년 런던에 본사를 둔 '찰스 제임스 주식회사'를 설립한 찰스 제임스는 이후 파리 오트 쿠튀르 데뷔(1937년), 레디투웨어 컬렉션 런칭(1939년), 엘리자베스 아덴의 의상 디자인 담당(1943년), 뉴욕 메디슨 에비뉴에 매장 오픈(1945년), Decade of fashion 전시 개최(1948년), 찰스 제임스 서비스 설립(1949년, 요즘 패션 정보회사와 같은 성격의 회사), 코티 어메리칸 패션 크리틱스 어워드 수상(1950년)으로 신비한 컬러와 위대한 드래핑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가구 디자인 전개(1952년), 아들 탄생에 맞춘 아동복 찰스 주니어 런칭(1956년) 등 20세기 전반기 동안 미국과 런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러나 1957년 미국 국세청은 그의 뉴욕 매장을 세금 미납의 이유로 압수하게 된다. 이는 무분별한 브랜드 성정의 이유이자 무차별적인 라이선스 남용의 결과였다. 결국 1958년 그는 자신의 만든 모든 상품과 상표권, 매장을 압수당하며 파산하게 된다. 1959년 마지막 재기의 노력으로 과거 고객들의 지원을 받은 'Non-Plagia, Inc'를 설립하지만 결국 가장 영향력있는 후원자의 후원 철회로 무산되었다.
파산과 함께 디자이너로써 은퇴한 그는 1960년대 각종 강의, 소규모 드레스와 주얼리 디자인 등을 하며 멘토인 할스톤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회고전을 가지며 디자이너로써의 커리어를 이어가지만 1970년 할스톤이 도와준 컬렉션이 혹평을 받으면서 또다시 좌절한다. 하지만 패션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존 시몬 구겐하임 메모리얼 파운데이션에서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러나 4년 뒤인 1978년 무일푼이 되 그는 폐렴으로 찰스 호텔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된다. 그가 죽은지 4년 후인 1982년 처음으로 그의 회고전이 브루클린 박물관에서 'The Genius of Charles'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많은 전시회가 열렸다. 최근에는 미국 메트로미술관이 알렉산더 맥퀸에 이어 두 번째 디자이너 회고전‘Charles James: Beyond Fashion'의 주인공이 되어 곧 전시회 개최와 더불어 브랜드 부활도 진행되고 있다. 과연 20세기 전반기에 누렸던 영화를 다시 재현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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