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토크 | Shoes Designer Paul Andrew 2014-12-08

영국의 시골 패션 보이, 뉴욕 패션이 주목하는 샛별★이 되다

단 몇분의 짧은 대화로 그는 캘빈 클라인과 도나 카란의 신입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단 2년 경력의 자신의 브랜드로 2014 CFDA/Vogue 패션 펀드의 수상자가 되면서 뉴욕 패션의 샛별이 되었다. 하지만 폴 앤드류에 말한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고. 영국 시골의 패션 보이가 뉴욕 패션의 주목을 받게 된 섹세스 스토리를 소개한다.




디자이너 폴 앤드류가 스틸레토를 디자인했을 때, 그는 신발을 착용하는 소비자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 모습에 디자이너는 희열을 느꼈다. 지난 2012년 가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한 신발과 액세서리 베테랑인 폴 앤드류에게 신발은 단지 물건이 아니다. “신발은 발을 넣고 신었을 때 자신감과 섹시,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는 그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앤드류는 일반적인 싱글 솔로 스틸레토와 관계없는 특성으로 편안함을 키워드로 제안한다, 아직 그는 고통에서의 자유나 물리적 편의성과 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편안함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폴 앤드류와 같이 일 하는 직원은 하이힐을 신어도 문제는 없다. 스타일과 섹스어필은 결코 희생할 없는 신발의 운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폴 앤드류는 많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2014 CFDA/Vogue 패션 펀드 수상을 자축하고 있다. 그는 CFDA/Vogue 패션 펀드 결선에서 남여성복을 제치고 우승한 최초의 슈즈 디자이너였으며, 2년 밖에 안 되는 그의 회사는 수상자에 언급된 최연소 브랜드며, CFDA/Vogue 패션 펀드에서 현금과 의미 있는 비즈니스 멘토링으로 상금 30만 달러(33천만원)를 받은 유일한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뉴욕이 이 젊은 디자이너를 주목해야 하는 승리의 해트 트릭인 셈이다.

 


그리고 CFDA/Vogue 수상은 이미 폴 엔드류 브랜드는 세계 패션계에 새롭게 주목받는 촉진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번 승리로 인해 그는 현재 뉴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국인 출신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뉴욕 패션계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어떻게 이 모든 일이 빨리 진행되었을까? 또한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계획은 궁금하다.

 

뉴욕 웨스트 58th 스트리트 슈트디오의 앤드류 책상에는 스케치와 컬러플한 패브릭 스와치, 아트북, 사진, 카타로그, 아프리카 조각 등 다양한 오브제가 들러 싸고 있다. 그의 사무실만 보더라도 그는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나는 12살 때부터 항상 패션과 함께 했다."고 말한다. 몇 년 동안 실내장식 디자이너로 영국 왕실을 위해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디자인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앤드류는 꾸준히 아버지 의 인테리어 일을 도우며 디자인적인 감성을 키웠다, "아버지는 여행을 위한 약간의 용돈을 주시곤 했다. 그럼 나는 그 돈으로 항상 패션 매거진을 샀다"고 회고하는 앤드류는 "나는 잡지 페이지를 찢어내 그것으로 내 방의 벽에 도배를 했다. 나는 할머니의 재봉틀을 상속받아 버린 시트나 내손으로 구할 수 있는 패브릭 조각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말했다.


 

그의 신발에 대한 사랑은 나중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 중 형이었던 폴 앤드류는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깊은 옷 장를 떠올렸다. 그는 "어머니는 아주 확실한 분이었다. 그래서 항상 나에게 뭔가를 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옷장에 여러 시간 앉아서 신발의 모든 디테일을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항상 엄마의 옷차림을 보면서 "엄마가 입고 싶은 옷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국 사우스 웨스트에 있는 윈저 성 부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폴 앤드류는 대 도시에 대한 꿈을 꾸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는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나를 런던으로 기차를 태워 데려다 달라고 졸랐고 덕분에 나는 하비 니콜스 매장을 숙독하고 웅장한 크리스천 라크로아 의상을 찾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계속 언급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 자신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 '아주 이상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릴 때 <보그> 잡지를 사기 위해 동전을 저축하기도 했다"고 말하는 그는 행복한 기억을 되살리는 예리한 감각을 자부심으로 기억하는 듯하다. 아마도 패션 북을 사고 신발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영국 시골에 사는 소년의 전형적인 행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호기심은 어쩌면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폴 앤드류는 삶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션 스쿨에 입학할 무렵, 그의 담당 교수는 그가 2년 동안 신발에만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그의 재능을 육성했다. 덕분에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의 가게인 코블러 매장(cobbler shop)에게 신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졸업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런던에서 졸업 패션 위크가 열리는 동안 나의 컬렉션 일정을 앞당겼다. 영국에 있는 모든 패션 스쿨은 그들의 탑 10 디자이너들만 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졸업 생 중 일부만 쇼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발되는 디자이너들의 숫자는 제한적이고 그 중 단 한 사람이 우승을 할 수 있었다."

 

1999년에 그는 졸업 컬렉션으로 우승을 했다.



그의 우승은 당시 런던에 있는 유명 매장인 야스민 조(Yasmin Cho)의 바이어 야스민 스웰(Yasmin Sewell)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야스민 스웰은 폴 앤드류의 졸업 컬렉션을 모두 구입했다. 그녀는 앤드류를 패션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알렉산더 맥퀸에서 그가 처음 견습생을 시작할 때 런던에 그가 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나는 말 그대로 돈이 없었다." 그는 몇 개월간 맥퀸에서 보낸 가난했던 시간을 회상했다(이 때는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를 프랑스 지주 회사인 커링이 구입하기 전이었다). “당시 나는 무급으로 일했다. 그러나 나를 믿었다. 나는 정규직 직원만큼이나 아주 열심히 일했다. 아주 재미있고 활력적이었고 나는 그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패브릭과 부자재, 컬러를 작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 프로세스를 배울 수 있었다.


 

"알렉산더 맥퀸은 제안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것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만의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 폴 앤드류는 이어 "내가 너무 일반적이거나 혹은 너무 상업적인 컬렉션을 구축하는 순간마다 나는 종종 알렉산더 맥퀸에서의 기억을 되새긴다. 맥퀸이 무엇을 한 거지? 어떻게 그는 이것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킬까? 등등 나는 그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맥퀸에서의 시간 이후, 앤드류의 아버지는 돈이 되는 직업을 구하라고 그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국판 <보그>가 그의 졸업 작품전에 대한 기사를 썼고, <보그> 측으로 부터 몇몇의 미국 디자이너를 만나러 뉴욕으로 오라는 초대장을 받게 된다. 그는 "당시 뉴욕으로 가서 랄프 로렌과 캘빈 클라인, 마이클 코어스, 나로시고 로드리게스를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나르시소 로드리게즈는 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폴 앤드류는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의 구두와 액세서리 라인 런칭을 도왔다. 아울러 주저하지 않고 앤드류는 자신의 짐을 싸서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사를 했다


 

뉴욕에서의 작업은 앤드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런던 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비즈니스 중심의 현재 미국의 패션 시스템에 들어가면서 아트적인 부분은 약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패션 비지니스 안에 있는 한 디자이너는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패션의 상업적인 측면을 배웠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의 나머지 경력을 위한 위대한 발판을 그에게 선물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미래의 CFDA/Vogue 패션 펀드 멤버들이 그의 성공을 모방하고 싶도록 만든 뉴욕 패션계의 선택은 전 세계 젊은 디자이너에게 꿈을 주는 현명한 통찰력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면 그의 내심은 다른 사람을 성공의 길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해만 만족해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많은 폴 앤드류의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소소한 실수를 했을 것이고 새로운 강박 관념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최고의 공장에서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 줄 캘빈 클라인과 도나 카란에서 일할 것이다. 그의 예술적 무결점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 질 것이다. 그리고 다음 과제는 폴 앤드류 브랜드 론칭을 결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의 회사를 시작한 아이디어는 몇 년 동안 앤드류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는 "나는 오랫동안 다른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지금 다른 디자이너와 일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그 경험은 나에게 아주 좋은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머징 디자이너로 추천받는 것은 다소 부담이 된다. 정말 회사를 설립해서 젖니를 뽑으려면 그들로 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내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하도록 마음을 움직인 진짜 이유는 약 26개월 전 부터 신발이 대해 생각하면서 부터였다. 아주 헤비하고 두툼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든 플랫폼은 결코 나의 개인적인 미학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더 세련되고 우아한 룩을 생각했다. 무엇인가 나는 새로움을 클릭할 것이다. 나는 신선한 실루엣의 뉴웨이브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많은 인터뷰어들에게 말한 성공 스토리다. 비록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꿈같은 현실로 보인다. 그러나 신발을 디자인하는 것과 엔지어링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물었을 때 시작부터 끝까지 무엇인가는 만드는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왕실을 위해 놀라운 가구를 만들기 위해 장인의 바늘과 기계 작업으로 일한 아버지처럼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공예와 물건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주위에 널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단지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작업을 할 때 마다 물리적인 공예 작업을 원한다. 나는 공장에서 첫 번째 힐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패턴을 자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편안한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발의 새로운 혁신을 창조하기 위해 이들 장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는 섹시 스틸레토 힐과 같은 것도 만들 예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비자들이 겉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숨겨진 내부의 편안함을 가질 것이다. 소비자들은 단지 신발을 신고 발로 그 편안함을 찾아내면 된다."

 

하지만 그의 편안함에 대한 아이디어는 경쟁 속에서 어떻게 눈에 뛰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힐을 신기 위해서는 아직도 일정 부분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 앤드류의 신발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대부분 예쁘고 일부는 야생적이다. 일부는 특징적인 시그너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실링백은 유니크하다. 많은 그의 펌프스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앤드류만의 날개 디테일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여러 시간동안 작업실에서 낙서를 하거나 스케치를 한다. 클래식한 펌프스를 다시 상상해 그것에 시그너처 디테일을 준다. 나는 브랜드를 존재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첫 시즌이 나왔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최근 나의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있다. 셀럽이 내 신발을 신는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분명히 좋은 칭찬이다. 또한 그것은 컬렉션에서 베스트셀링 중 하나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하다."

 

폴 앤드류의 신발을 주문한 리테일러는 사우스 마이애미의 카프레토 슈즈다. 그곳에서 제이슨 살스텐인 수석 바이어로 일한다. 제이슨 살스테인은 앤드류에 대해 "그는 섹시, 소피스티케이트, 모던, 클래식 슈즈로 돌아왔다. 그의 디테일과 퀄리티에 대한 관심은 완벽하다. 구조적의와 가능한 편안한 힐을 만들려는 그의 열정은 소비자들이 폴 앤드류 신발을 발에 넣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베니티 페어> 매거진의 액세서리 디렉터 데이지 쇼의 "그의 신발은 아주 편안하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 부담 없이 신을 수 있다."는 반응에 폴 앤드류는 본질적인 지적에 맞장구를 쳤다. "고정된 밑창 대신 앵클 스트랩은 실제로 안창에 작은 구멍이 있다.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들어갈 때 벌이지는 것을 막고 신발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현재 수천 명 여성들의 관심과 함께 거의 모든 주요 리테일러들과 CFDA/Vogue 패션 펀드 심사위원들은 궁금해 하는 것은 앞으로 그의 진로일 것이다. 상금 30만 달러는 비즈니스의 또 다른 요소를 받아들여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착용감과 편안함을 가진 구두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해야 할 작업이 많다는 점도 인정했다.

 

폴 앤드류에게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은 강박관념이다. 그는 "나는 무엇인가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수행해야 하는 일이 많다. 나는 회사를 확장시키기 위해 상금 중 일부를 투자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담한 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신발은 시장에서 사장 편안하고 동시에 가장 섹시하고 아름답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성공에 대한 자신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다른 카테고리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팀과 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론칭할 맨즈 슈즈 컬렉션에 대해 공장과 미팅을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확정된 것도 없고 아직 스케치에 대해 타결을 본 것은 아니지만 향후 12개월을 위한 나의 미스터 플랜에는 무엇인가 확실한 것이 있다. 거기에는 잠재적으로 나의 e-커머스에 대한 생각도 있다. 나는 우리 온라인 파트너와 함께 하고 있는 컬렉션이 잘 되길 바라고 안나 윈투어도 런치에 대해 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폴 앤드류는 또한 패션 펀드에 의해 그에게 멘토로 지정된 토리 버치에서 일할 예정이다. 그는 "토리 버치가 짧은 시간동안 이룩한 성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슈즈와 디자인 세계에서 확실한 실루엣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냈다"고 말했다. 가까운 미래에 그는 토리 버치에게 무엇인가 질문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는 디자이너와 비즈니스맨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배우기를 계속할 것 이다. 아마도 그는 이 모든 것이 언제가 모두 사라지는 꿈이 되는 것을 그는 거부한다. 그의 소원대로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앤드류는 수백 개의 스케치를 양산할 것이고 디자인 프로세스의 모든 단계를 통해 각각의 모델을 생산할 것이다. 그는 다음 단계로의 성장을 위해 늘 넥스트 컬렉션을 위한 작업을 할 것이다.

 

꿈은 늘 기록하는 자의 몫이다. 어릴 때 시골 소년이었지만 동네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언젠가 저 기차를 타고 나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보그> 잡지를 보며 꿈을 키웠던 고 앙드레 김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영국 시골 소년의 구두에 탐닉할 때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기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배고픈 헝그리 정신을 좌절이 아닌 기폭제로 삼은 그의 도전 정신은 청년 실업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대한민국 패션 학도들에게는 패션의 변방에서 태어난 운명을 탓하기 보다는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가는 파랑새의 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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