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2016-01-12 |
故 데이빗 보위의 지울 수 없는 패션 영향력을 되돌아보다
현존하는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 스타일 아이콘 데이빗 보위가 암 투병을 하다가 향년 69세 나이로 지난 1월 10일(현지 시간) 일요일 사망했다고 SNS를 통해 발표했다. 글램룩과 앤드로지너스룩의 선구자였던 그가 패션에 미친 영향력과 그의 음악 인생에 대해 알아본다.
음악, 예술 그리고 패션계는 지난 일요일, 위대한 예술인이자 스타일 아이콘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보위(1947년 1월 8일~2016년 1월 10일)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했다. 특히 세계 패션계는 미래주의 패션의 선구자 앙드레 꾸레주와 함께 위대한 스타일 아이콘을 함께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있다. 올해 69세인 데이빗 보위는 지난 18개월동안 힘겨운 암투병을 벌이며 생에 대한 애착을 보였지만 결국 지병으로 사망해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특히 데이빗 보위는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 이틀 전인 이달 8일 새 앨범을 발표해 더욱 팬들의 안타까움을 안겼다.
1947년 영국 런던 브릭스톤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본명 David Robert Jones)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런던의 클럽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1964년에 데뷔하였으며 1966년부터 데이비드 보위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데이빗 보위는 1970년대 영국을 강타한 글램록(Glam Rock)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글램록은 퇴폐적인 분위기나 독특한 의상, 화려한 분장이 특징인 장르이다. 그는 여성스러운 외모, 가냘픈 몸, 오드 아이 등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며 글램록의 인기를 이끌어 냈으며 실제로 그는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밝힌 바 있다.
록 음악의 역사뿐 아니라 패션계에서 몇 안 되는 남성 아이콘 중 하나인 데이빗 보위는 요즘 트렌드인 앤드로지너스룩(Androgynous look)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특히 그의 인생을 그리는 영화 <벨벳 골드마인>에서는 매혹적이지만 충격적인 비주얼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 보위는 성별을 파괴한 짙은 음영 메이크업과 반짝이는 메이크업으로 화려함의 정점을 보여 주었다. 그가 무대 위에서 즐겨 사용하던 화려한 글리터는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또한 몸매가 드러나는 스키니한 핏의 의상에 여자들이 신는 플랫폼 슈즈 등을 신고 등장해 앤드로니너스의 교과서적인 룩을 대중적으로 처음 선보였다. 펑크를 상징하는 가죽과 모피 소재는 70년대 젊은이들의 반항적인 정신과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상징했고 젠더리스 패션은 자유로운 히피문화의 철학을 상징했다.
따라서 가수였던 데이빗 보위는 패션 산업의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것 이상으로 세계 패션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데이빗 보위는 에디 슬리먼, 릭 오웬스, 리카르도 티시 등의 패션 디자이너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따라서 데이빗 보위가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면 찍은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는 작업은 셀프 스타일링 파워와 지속적인 재창조 그리고 담대함과 유별난 능력을 기르기 위한 마스터 클래스다. 패션 에디터, 스타일리스트, 디자이너들에게 데이빗 보위는 옛날에 왕이였고 지금도 여전히 왕이다.
지난 1973년 <알라딘 세인>을 발표한 후 수 십년이 지났지만 에디터들은 기사에서 여전히 앨범 커버에 있는 그의 얼굴을 가로 질러 그린 붉은 빛 번개를 참조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그의 패턴이 들어간 보디슈트를 재현하고 있으며, 스타일리스트들은 모델들의 눈을 통해 데이빗 보위의 시그너처인 애꾸눈 마개를 아직도 응용하고 있다. 만약 머리를 강렬한 오렌지 레드로 염색한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그의 파격적인 패션 에너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아쉬워하며 데이빗 보위가 패션에 영향을 미친 일부 사진들과 그의 룩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소개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데이빗 보위의 삶과 음악
1947년 런던 남부 브릭스톤에서 데이빗 로버트 존스라는 본명으로 출생한 그는 고교졸업 후 광고 대행사에서 근무하며 일과 후 런던 근교의 클럽들을 전전하면서 활동을 펴왔는데 그의 재능은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쉽게 발굴되어 당시 슈퍼 그룹이던 The Who와도 같이 공연할 정도였다. 19세 때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David Bowie··· Tuesday」라는 앨범을 발표하여 발군의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데뷔 초기에 그는 동양의 불교에 심취되서 한때 삭발까지 했으며, 초기 그의 음악성은 이런 색채가 두드러졌다. 1967년에는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앉힌 대작 <Space Oddity>가 RCA 마크를 달고 출반되어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스페이스뮤직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를 명실공히 스페이스 사운드의 왕자로 부각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런던 버킹햄에서의 프리 페스티벌에 모여 그를 환호하는 팬들을 보고 당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대중들은 내가 진정으로 들려주려고 하는 부분에서는 딴전을 피우다가 정작 별 의미없는 사운드에서 열광하더군요. 뭔가 핀트가 어긋났던 거지요.”
그만큼 그는 자신의 음악에 깊은 뜻을 담고 싶어했고 그 뜻이 대중에게 전달되기를 원했다. 이후 발표하는 그의 앨범들은 매 작품마다 그 스타일이 각기 개성이 있어서 그의 독특한 음악성을 대변해 주는데 69년말 「The Man Who Sold The World」는 그의 재능의 다변함과 무한한 가능성에의 도전을 암시해주며, 71년에 나온 「Hunky Dory」와 1년 뒤에 발표된 긴 제목을 가진 「The Rise & Fall of Ziggy Stardust & The Spiders From Mars」는 그 음악적 스타일이 전혀 달라서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였다.
이것은 다른 아티스트들이 자기의 개성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반면 그는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여 선보인다는 점이 그의 특징이며 다른 아티스트들이 그의 음악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The Rise···」앨범은 제니스 조플린과 지미 헨드릭스의 타계를 애도하는 내용의 음반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그는 메이크 업이 유난하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 시초가 된 무대는 가부끼 극장에서의 공연 때 우주인같은 메이크업과 괴상한 장화, 물들인 머리 등은 많은 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후 전역을 순회공연하며 내놓은 「Aladdin Same」 앨범은 <Panic Im Detroit>, <Cracked Actor>, <Drive In Saturday>, <Jeon Genie>, <Snuck off To The City> 등 버라이어티한 히트곡을 담고 있어 이 앨범은 미국에서 상당한 그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국공연을 마치고 발표한 앨범 「Diamond Dogs」는 조지 오웰의 고전적 공상소설인 “1984”와 전위작가 윌리암 바로우스의 소설과 저작 등에서 발상을 해서 만든 것으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롭고 경이적인 시도였다. 이 중에서 특히 바로우스의 저작활동에는 직접 견학까지 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바로우스는 가위로 종이를 자르면 그 형태를 보고 소설의 소재를 구상하는 유별난 작가였다.
그러나 이런 특이하고도 기발한 것들을 그냥 놔두질 못하는 보위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Diamond Dogs」를 구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존 레논과의 합작으로 유명한 <Fame>이란 싱글이 들어 있는 「Young Americans」라는 앨범은 미국 필라델피아주의 시그마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레코딩된 현대 영혼의 타락과 잔인성을 고발한 작품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76년부터 그는 영화에 관심을 표시하여 니콜라스 로그 감독의 공상과학 영화인 『The Man Who Fell To Earth』에 주연으로 출연, 우주에서 지구로 떨어진 한 우주인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해서 연기력에서도 호평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조심스럽게 사운드의 변화를 표현하게 되며, 그 첫 앨범인 「Station To Station」이 좋은 반응을 얻자 스테이지에서도 변화를 구사해 주는 그의 초자연적인 무대를 보던 팬들은 누구나 커다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또 같은 해인 76년과 77년에 발표한 「Changes One Bowie」와 브리티쉬 아방가드, 브라이언 에노와의 합작품인 「Low」에서도 새롭고 획기적인 사운드를 보임으로서 그의 역량의 한계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기도 했다.
78년 그는 세계연주여행의 장기공연을 시작하는데 이때는 주로 「Station To Station」, 「Low」, 「Heros」 등의 삽입곡을 주로 부르기도 해서 이들 앨범이 그에게 특히 애착이 가는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장기공연 여행이 끝나자 그는 두 번째 영화 출연작인 『Just A Gigolo』에 등장했으며 「Low」, 「Heros」에 이은 브라이언 에노와의 세 번째 합작 앨범인 「Lodger」가 19곡의 싱글을 담고 79년에 발표되었으나 그의 부인이던 앤지 보위를 롤링 스톤스의 미크 재거에게 빼앗기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80년 9월 19일 이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와 「Scary Monsters」를 발표해 그를 아끼는 팬들을 안심하게 해주었다. 1981년 들어서는 그룹 퀸과의 합작 싱글인 <Under Pressure>를 발표하고 76년 「Changes One Bowie」의 후속 앨범격인 「Changes Two Bowie」를 내놓고 82년 그의 세 번째 영화음악인 『Cat People』, 그 후에도 계속 영화 음악에 몰두해서 「Cat People」에 이어 『Christine F.』를 후속타로 내놓더니 82년 7월에는 “Brecht”라는 오페라의 5곡의 뮤지컬 송을 담은 「Bertolt Brecht's Baal」를 이색적으로 내놓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환상적이고 시적인 휠링의 톤을 구사하며 그만의 독특한 미래 암시적이고 두려움을 느낄 만큼 신비한 분위기의 보컬을 보여주고 있어 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음악성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한다.
<페임>, <히어로스>, <레츠 댄스> 등의 히트곡을 남겼으며 그의 음반은 총 1억 3000만 장이 판매되었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로도 활약하였으며 <라비린스>(1986), <인스피레이션>(1997) 등에 출연한 바 있다. 1996년에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7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7년에는 인터넷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웨비상(Webby awards)을 수상한 바 있다. 한편 보위는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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