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4-12-26

경제 대국 3위 독일이 세계 패션의 주전으로 못 뛰는 이유

세계 경제 규모 3위인 독일은 유럽에서도 가장 큰 패션 소비 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독일은 세계 패션계에서 런던, 파리, 밀라노처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패션은 문화 수준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공한다면 10위 안에 든 중국이나 일본, 한국, 홍콩은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세계 패션계의 메이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보자.




올 한해 국내 패션 단체와 정치권에서는 새로운 FTA 시대에 맞는 K 패션의 출구 전략을 찾느라 분주하게 보냈다. 결국 문제는 포스트를 어디에 두는 가의 문제다. 섬유 패션 도시 대구의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지자체의 움직임과 동대문 시장을 거점으로 한 패션 클러스터를 만들려는 수도 서울의 움직임에 경기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K 패션 빌리지를 조성하려는 경기도 역시 나서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내 놓아야 하는데 아직 핵심 컨텐츠 전략보다는 부동산에 치중된 전술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올해 온라인 미디어 <비즈니스 오브 패션>이 소개한 독일이 패션의 메이저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한 글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고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독일은 롤 모델이기 때문이다.


2013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발표한 세계 무역 점유율을 기준으로 세계 10대 무역 대국 현황을 보면 중국과 미국에 이어 독일이 3위다. 패션으로 독일보다 잘 나가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는 각각 5, 7, 10위였다. 아시아 국가인 중국과 일본, 홍콩, 한국이 각각 1, 4, 8, 9위를 차지하며 10위 안에 들었지만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변방 취급을 당하고 있다. 10위안에 들어간 한중일 3국이 독일처럼 패션 메이저로 부상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기사를 통해 알아본다.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세계 3위 경제 대국 독일은 유럽의 패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2012년 까지만 해도 경제 대국 1위인 미국이 세계 패션에 있어서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렇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독일은 유럽 최대의 국가 경제를 가지고 있고 의류와 신발의 최대 소비 시장이다. 베를린에만 10개의 패션 스쿨이 위치하고 있고 메르세데스벤츠 패션 위크와 더 나아가 5개의 세계적인 패션 트레이드 페어도 가지고 있다.

 

또한 독일의 도시에는 패션 기업으로 넘쳐난다. 도시를 만드는 공공-민간 계획인 비즈니스와 기술을 위한 베를린 파트너' 보고서에 따르면 베를린에만 3,670개 기업이 위치하고 뭔헨에 2,670, 함부르크에 2,220, 쾰른에 1,910개 패션 기업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독일은 또한 휴고보스부터 에스카다질 샌더에 이르기까지 몇몇 럭셔리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아디다스와 푸마와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여기에 패스트 패션의 괴물로 통하는 H&M은 독일을 가장 큰 시장으로 간주하고 있을 정도로 독일은 비즈니스 적으로 나름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여전히 세계 패션계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뉴욕과 런던, 파리, 밀라노가 빅 4 패션 수도로 그 파워를 과시하고 있더, 즉 이들 빅 4의 주도로 세계 패션은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독일의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뮌헨, 쾰른 중 그 어느 도시도 빅 5에 진입하고 있지 못한 상황은 의문이 남기도 한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독일과 월드 디자이너 제품을 전시하고 있는 베를린 부티크 & 세일 에이전시 '템퍼러리 쇼룸'의 크레이이티브 & 매니징 디렉터 마틴 프레무지크는 "독일은 지금까지 실제로 빅 브랜드를 가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보통 독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칼 라거펠트를 떠올릴 수 있지만 나는 그를 독일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독일인보다는 프랑스인에 가깝다. 물론 우리는 독일인 디자이너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인 도나 카란이나 다른 유명 디자이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패션 전문가들은 독일 브랜드들은 그들의 제품에 그들만의 유산을 입히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거의 독일다움이라는 감각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에스카다 메가 미탈 회장은 "우리의 뿌리는 독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글로벌 브랜드로 불린다. 우리 수익 대부분은 독일 밖에서 벌어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 뉴욕 패션 위크에서 패션쇼를 선보이고 있는 휴고 보스와 다양한 국가에 진출한 에스카다는 모두 미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윈게이트와 제이슨 우가 각각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프랑스 패션 하우스 샤넬의 대명사가 된 칼 라거펠트 역시 그 자신을 단지 '유럽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판 <하퍼스 바자> 패션 디렉터 카이 마르그란더는 칼 라거펠트와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비 디렉터 토마스 마이어와 포토그레퍼 유르겐 텔러를 언급하며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패션 사진작가들도 뛰어난 패션 재능을 가진 (독일의) 매력을 잘 보여 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적인 성공을 얻기 위해 파리나 런던, 뉴욕과 같은 영감을 주는 환경을 찾아 독일을 떠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절제와 소박함을 중시하는 독일인의 취향도 독일의 상대적으로 작은 패션 영향에 대한 이유의 일부분이 될 수도 있다. ‘휴고 보스질 샌더’ ‘에스카다와 같은 몇 몇 주목할 만한 브랜드 외에 정작 독일의 가장 큰 의류 브랜드는 독일의 고령화 취향을 반영한 실용적인 베이직과 스타일을 제공하는 중가 시장에 위치해 있다. 그 이유는 독일이 현재 EU 국가 중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가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독일에는 세계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많은 빅 브랜드가 많다. 독일 패션 그룹 게리 웨버(Gerry Weber)’는 세계에서 가장 큰 100대 패션 기업에 에르메스’ ‘프라다와 함께 랭크되어 있다. 바이에른 브랜드 에스 올리버(s.Oliver)’뉴요커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 위치한 브랜드로 둘 다 지난해 연간 매출이 10억 유로를 초과했는데 대부분 건강한 내수 판매를 통한 수익이다. 두 브랜드 모두 글로벌 스토어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이나 영국 시장 어디에도 진입하지 못한 상태다.

 


독일 선데이 신문인 <벨트 암 존탁>의 스타일 에디터 아드리아노 색은 "독일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패션에 관한한 아주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이유는 아마 프로이센 민족 특유의 노동과 삶에 대한 윤리와 일반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주 미묘하고 덜 '유행'하는 브랜드는 독일에서 아주 잘 되지만 보통 독일인들은 그들의 돈을 쿠튀르보다는 자동차에 더 많이 쓴다."고 덧붙였다.

 

템퍼러리 쇼룸'의 크레이이티브 & 매니징 디렉터 마틴 프레무지크는 템포러리 쇼룸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글로벌 브랜드라고 로 말하며 "독일인들이 고기능성 의류를 좋아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어 "패션에 관한한 독일인들은 그렇게 많이 소비하지 않는다. 나는 매장에서 그것을 실제로 느낀다. 독일인들은 비교적 안전한 물건으로 더 많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세계 패션에 대한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결여된 이유로는 독일의 분열된 정치 역사와도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1871년부터 게르만 민족이 처음으로 통일되었을 때 나라는 반복해서 분열됐다가 다시 합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로 갈라진 독일은 두개의 서로 다른 경제와 정치적 시스템으로 나뉘어 20세기 후반의 대부분을 보냈다.

 

오늘날에도 독일은 가난한 북부와 부유한 남쪽 사이에 각각 고유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는 16개의 연방 자치주인 분더슬란트(지리적 상태)의 편협에 의해 어느 정도 나뉘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판 <하퍼스 바자> 패션 디렉터 카이 마르그란더에 의하면 어느 정도 독일 역사에 만연했던 분열은 국가의 패션 인프리 구축에 있어 응집력 부족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카이 마르그란더는 "만약 독일 패션 산업이 통일 후 지난 25년간 패션 캐피탈로 하나의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 관리를 했더라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뮌헨, 뒤셀도르프 등의 도시들이 더 세계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이러한 포커스를 찾는 작업과 아직도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덧붙였다. "독일의 많은 것들을 볼 때 그 뿌리는 나치 통치의 어두웠던 시절이라고 확신한다. 히틀러가 나치 통치를 시작한 1933년 이전의 베를린은 세계의 주요 패션 수도였다. 베를린의 와일드하고 데카당트한 나이트라이프는 당시 패션의 화려한 오락을 위한 국제 무대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독일의 자유정신은 나치 통치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유대인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국가에 의해 강제 퇴출당했고 자유주의 마인드의 창조적이고 지적인 엘리트

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국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 손실과 상처로 부터 회복 중"이라고 마르그란더는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진화되고 있는 징후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베를린은 자석 같은 창조적인 커뮤니티의 넓은 범주로 매력을 끌고 있다. 그리고 2007년 메르세데스-벤츠 패션 위크 베를린이 시작된 첫 시즌이후 패션쇼와 패션 위크 기간 동안 열리는 프리젠테이션 수가 거의 다섯 배나 늘었다고 한다. 베를린 파트너에 의하면 600명에서 800명 사이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도시에 사무실을 내겠다고 요구하면 시정부는 창조적인 기업을 포함한 로컬 기업을 위한 보조금으로 7,500만 유로(10084천만원)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베를린은 독일의 창조적 진원지"라고 말하는 메르세데스-벤츠 패션 위크 베를린은 진행하는 IMG의 대변인은 "도시의 영감적인 에너지와 다양한 커머셜 기회는 새롭게 부상하는 신인 디자이너와 기성 디자이너 모두에게 완벽한 보금자리를 창조한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 브그 에디터 수지 멘키스는 "독일 패션 하우스에는 다소 딱딱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거의 허송 생활하는 프랑세즈(프랑스에서 시작된 춤)와는 반대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펙타클에 대한 테이스트가 퇴색하는 요즘 패션 상황을 언급하며 "이번이 독일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 작은 수의 빅 브랜드들이 베를린 패션 위크에서 쇼를 한다고 한다. 특히 지난해 휴고 보스가 뉴욕 쇼를 위해 서둘러 떠난 것은 가장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 패션에 대한 인터내셔널 패션 프레스들의 관심도 적은 편에 속한다.

 

2012년 발렌시아가에서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자문 역할을 하다가 독일의 넥스트 빅 디자이너로 부상한 코스타스 무르쿠디스는 베를린 패션 위크에서 패션쇼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실질적인 경쟁이 없는 도시에서 열리는 국내용 자축 행사에 참가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나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실패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린의 패션 스쿨 역시 뉴욕이나 런던, 파리, 밀리노에 비해 국제적인 명성도가 떨어진다. 또한 12월 초에 베를린의 중요한 국제적인 트레이드 페어인 브레드& 버터의 내년 1월 행사가 취소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주최 측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이번 시즌에 참가업체의 수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했지만 동기부여를 제대로 제공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베를린은 다크랜드를 포함한 알렉산드르 플로코프와 라프 시몬스X스털링 루비와 같은 핫한 브랜드, 안드레 무르쿠디스, 북부 쇠네베스크의 갤러리 밀집 지역, 혁신적인 패션과 인테리어 디자인 오브제를 제공하는 블레스 등 다수의 선구적인 매장의 고향이다. 또한 국내 패션의 롤 모델로 울마크 프라이즈 최종 후보에도 오른 틸만 라우터바흐와 어거스틴 테보울과 같은 젊은 브랜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베를린의 패션 현장은 여전히 신출내기이자 작은 규모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희망도 보인다. "요즘 독일 패션의 움직임은 새롭고 창의적이며 그리고 젊기 때문에 현재 자신만의 시그너처를 개발 중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시간이 걸라는 작업이다."라고 베를린 기반의 신인 디자이너 마리나 호르만시더가 말했다. 현재 독일의 튼튼한 경제가 거친 물결과 잠재적인 경기 침체로 향함에 따라 소박하고 에지있고 아방가르드하고 사회적 의식이라는 도시를 반영한 강력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패션 아이덴티티를 육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럼 나치즘과 분단으로 인해 패션 발전에 더디게 이루어진 독일과 달리 역시 파시즘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이태리가 독일과 달리 세계적인 패션 캐피털을 만든 비결을 살펴보는 것도 마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이태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보여준 정교한 테일러드 아이템과 실용적인 기성복, 그리고 미소니 패밀리에 의해 개척된 시크한 니트웨어, 로마 기반의 오트 쿠튀르 산업은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프랑스와 영국,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태리 패션은 대내외적 환경으로 인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비교적 천천히 발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확실한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1945년의 전후 이태리 정부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금융 몰락으로 쇠약해진 나라를 부흥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마샬 플랜을 통한 미국 원조와 함께 이태리의 많은 기업가들의 노력에 의한 공장의 빠른 재정비는 이태리 패션 전후 복구의 초석을 다졌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 후인 1950년대에 이태리는 파리가 주도하고 있는 오트 쿠튀르에 참여한다. 이태리는 20세기 초부터 패션 액세서리와 작은 가죽 제품을 수출해 왔으며 12세기 이래로 베니스, 피렌체, 로마에서 고급 직물과 신발, 주얼리를 생산해 온 뛰어난 제조 기술을 가졌음에도 파리나 런던에 비해 쿠튀르 산업에 상당히 늦게 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 불안정한 정국이 이태리 패션의 단일화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태리 디자이너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주변국인 파리와 런던 디자이너들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사업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조르지니(Giovanni Battista Giorgini)는 미국 백화점의 이태리 제품 구매 담당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렌체 주거지였던 빌라 토리아니에 패션 회사를 설립하고 패션쇼를 열 계획을 세운다. 19512월 피렌체에서 열린 첫 번째 패션쇼에 외국 바이어와 프레스들에게 불러오는 데 성공한다. 미국의 바이어와 프레스가 대부분이었지만 이탈리아 패션이 처음으로 국제 패션 시장에 선을 보인 셈이다.

 

첫 패션쇼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다음 패션쇼는 피렌체 피티 궁에서 치러야 했다. 1952년에 살라 비앙카(Sala Bianca)에서 19세의 로베르토 카푸치가 첫 선을 보였다. 이것은 이태리파의 탄생으로 이들은 프랑스의 쿠튀르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페라가모, 구찌, 푸치 같은 브랜드는 제트족의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강렬하고 독특한 프린트의 실크 저지 시프트 드레스는 납작하게 접을 수 있었으며, 손수건처럼 작아 여러 개의 가방을 들고 가는 여행에 완벽한 아이템이었다.


 

50년대 이후 의상 디자이너와 텍스타일 제조업자들은 점차적으로 거래를 재개해 그들의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은 전쟁 중에 사라졌던 매력적인 패션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태리의 하이패션은 탁월한 테일러링은 수출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또한 이태리 패션의 테일러링에 대한 열정 또한 전후 10년 동안 비정형의 세련된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이태리의 테일러드 의류의 명성은 스타일리시한 이탈리아 배우들의 유명세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ianni)60년대 영화 <라 돌체 비타>에서 입은 트림 수트는 이탈리아 수트를 세계적으로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이태리에는 수없이 카피될 정도로 탁월하고 재능있는 디자이너 마르케세 에밀리오 푸치가 있었는데 그는 40대에 패션 사업에 뛰어 든 늦깎이 디자이너였다. 피렌테에서 일한 푸치는 애시드 브라이트 컬러와 사이키델릭 프린트로 만든 타이트한 실크 저지 시프트 드레스와 셔츠, 캣 수트, 이브닝 드레스, 카프리 팬츠와 수영복을 소유하고 싶었던 할리우드 제트 족들에 의해 유명세를 탔다. 푸치는 자신의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스윌리 디자인(Swirly design)1960년대 팝 아트 패션의 원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스트레치 천을 이용하여 고속 보트, 컨버터블 자동차와 비행가 여행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줄무늬와 더불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꽃무늬가 있는 타이 & 로시타 미소니의 아름답고 예술적인 니트웨어는 1967년에 피렌체의 피티 궁에서 발표된 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소니는 독창적인 장인 정신을 간직한 가족 사업으로 계속 번창했다. 피렌체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구찌와 페라가모 브랜드는 할리우드 제트 족들 사이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 된 최고급 수제화와 가죽 제품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엘리트 디자이너들을 호칭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 바로 호화로운 삶을 뜻하는 라 돌체비타(la dolce vita)를 의미하는 구치 푸치 신드롬(Gucci-Pucci Syndrome)'이다.

 

다른 한편으로 1967년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가 만든 도발적인 패션 레이블 피오루치가 있다. 그 가게는 처음에는 런던의 카나비 스트리트와 뉴욕의 패션 트렌드를 밀라노로 가져왔고, 그 후에는 언더그러운드 스타일과 밝은 색상, 애니멀 프린트를 사용하여 독특한 룩을 만들고 신축성 있는 데님과 디자이너 진의 개념을 시장에 도입해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브랜드를 확장했다. 이 가게들은 책과 가구 그리고 당시의 팝 문화를 반영하는 음악 뿐 아니라 빈티지 패션까지 포함시켜 확장시켜 80년대까지 그 인기를 이어 나갔다.

 


드디어 메이드 인 이태리가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경제는 패션과 텍스타일 산업의 활성화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했다. 사회적,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패션 산업은 활짝 만개했다. 다수의 패션 및 관련 제조업체들은 대부분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어 패밀리 경영이라는 이탈리아 특유의 시스템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오트 쿠튀르의 인기로 인해 제조 패션에 다시 한번 부흥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패션 프레스와 광고 산업 주변 의류 및 텍스타일 공장과 함께 밀라노는 이태리의 새로운 패션 캐피탈로 부상한다. 이제 '메이드 인 이태리'는 영화, 아트, 푸드, 여행, 디자인과 같은 프리미엄 제품의 다양성을 축하하는 마케팅 캠페인이 되었고 그 중에 최고가 바로 패션이었다. 이러한 수 십 년간의 국제적인 프로모션 캠페인은 '메이드 인 이태리'가 세계적인 스타일 트렌드 마크가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가 되자 이탈리아 패션은 열정을 쏟아 붓고 모든 창의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어 도약을 하게 된다. 트렌드를 찾아내고 재능을 육성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은 전 유럽으로부터 바이어와 프레스를 끌어 들일 수 있었다. 밀라노는 피렌체, 프라토, 발다뇨와 롬바르디 같은 이탈리아 모직 센터를 중심으로부터 접근이 용이한 곳에 위치했으며 그곳에서는 면 섬유도 생산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의류 제조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여성과 남성 기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살롱의 발달을 장려했다.

 

1965년에 펜디는 칼 라거펠트를 모피와 작은 가죽 제품을 판매하던 소규모 가족 회사의 디자이너로 고용했다. 1950년에 가족 공장의 경영권을 넘겨받은 니노 세루티는 1964년에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조수로 고용하여 밀라노에 남성복 부티크 히트맨을 열었으며 자신의 모든 핵심 기술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70년에 세루티를 떠나 1974년에 파트너 세르지오 갈레오티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아르마니는 영국의 테일러링 전통에 도전했으며 재킷을 해체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1975년에는 여성을 위한 첫 컬렉션을 만들었다. 앤드로지너스 룩에 영향을 받은 라인은 역동적이지만 절제된 느낌을 주었다. 특히 남성 주도적인 분야에서 점차로 늘어나던 여성들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절제된 스타일을 제안했다,


 

1970년대 중반에 지아니 베르사체는 밀라노로 옮겨 갔으며 제니, 칼라간, 콤플리체의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 밀라노의 비아 델라 스피가에 최초의 베르사체 부티크를 열었다. 타이 & 로시타 미소니 부부는 기성복 니트웨어 사업으로 1970년대 초 최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안토니오 로페스의 멋지고 선정적인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들이 판매하는 제품만큼이나 독창적이었다.

 

결국 밀라노는 세계 패션이 중심지로 파리 다음으로 두 번째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탈리아 패션은 호화로우면서도 입기 쉬웠다. 여전히 오트 쿠튀르에 맞춰져 있는 고객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일종의 우아함이었다. 로마 역시 더 거대해졌고 발렌티노를 중심으로 왕족과 셀러브리티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발표하며 이탈리아 하이 패션의 중심지로 떠올라 이태리 패션의 중요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이제 우리 모습을 살펴보자. 경재 규모로 본다면 한중 FTA에 이어 한일 FTA까지 발표된다면 한중일 3국의 패션 시장 규모는 유럽이나 미주에 비해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패션 컨텐츠다. 몇 년 전부터 한류 바람을 타고 K 패션을 언급하고 있지만 정작 디자이너에게 K 패션의 정체성에 대해 물으면 구체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울이든 대구든 아니면 양주가 되든 세계적인 패션 캐피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넣은 패션 컨텐츠부터 확보해야 한다. 결국 창조적이고 유니크한 K 패션만의 시그너처를 만들어 내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많이 발굴하고 육성하는 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처럼 지난하고 고단한 길을 걸어야 한다. 이미 밀라노 프로젝트를 통해 컨텐츠 없는 부동산 마인드의 패션 비즈니스가 얼마나 허망한지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태리 패션 산업의 발전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바잉이 없는 위탁 판매 패션 유통 시스템에서 하이엔드 패션은 그 생명력을 가질 수 없고 젊은 꿈나무들은 크리에이티브형 디자이너가 아닌 생존형 디자이너가 될 수밖에 없다. 국내 백화점이나 편집 매장에서 조차 수주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해외 프레스와 바이어를 초대하는 패션 위크와 트레이드 페어 쇼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년 1월에 열릴 예정이던 브레드&버터 베를린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은 우리의 트레이드 페어 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난 독일과 이태리의 서로 다른 행보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어쩌면 2차 세계 대전이후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 역시 패션 산업도 독일이나 이태리에 비해 그리 늦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분단 상황과 왜곡된 유통 구조, 천재형 디자이너 부족 등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이 된다. 패션이 공방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파인 아트와는 태생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외형보다 내실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한민국 K 패션를 창조하기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응집력이 생겨야 K 패션은 그 추진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상승세가 무섭다. 이제 부터라도 제대로된 시스템과 전략, 전술을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태리 패션의 발전에는 바로 창의적인 디자이너와 수공예적인 장인 정신과 우수한 원단이 그 바탕이 되었으며 패션(Fashion)이 음식(Food)과 가구(Furniture)와 함께 이태리 버전의 3F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 주목하자.

 

글 유재부 패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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