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토크 | 이사벨 마랑 Isabel Marant | 2014-11-05 |
"나의 성공은 강력한 기반 구축과 집중력, 성실함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이사벨 마랑은 지난 20년 동안 성공적인 글로벌 브랜드 신화를 이루며 지난해 약 2,023억3,800만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그의 성공에는 우리 젊은 디자이너들이 알아야 할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BOF> 인터뷰 내용을 통해 그녀만의 성공 비결을 살펴본다.
디자이너 이사벨 마랑이 스튜디오 베르소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마리 루키(Marie Rucki) 교장 선생님은 그녀에게 귀중한 지혜 덩어리를 선물했다. 마리 루키 선생님은 그녀에게 “스스로도 입기 원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결코 디자인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씀은 시작부터 그녀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고, 그녀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속 알려주어 현실적인 접근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인터넷 미디어
실제로 마담 마리 루키의 현질적인 옷을 만들라는 충고 덕분에 이사벨 마랑은 지난 20년 동안 매년 20~30% 사이를 오가는 하이엔드 디자이너 브랜드로는 놀라운 성장률을 보였다. 특히 2013년에는 1억5천만 유로(약 2,023억3,800만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또한 작년에는 H&M과의 메이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세계적으로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인지도를 확실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사벨 마랑이 회사의 전체 소유권을 보유한 사실을 통해 더욱 인상적인 성과를 확인하기도 했다.
종종 보헤미안과 약간의 로큰롤을 둘 다 소화하는 방법으로 시크를 표현하는 이사벨 마랑의 옷은 기본적으로 아메리칸 스타일의 스포츠웨어를 유니크한 프랑스식 감성으로 여과시킨다. 이러한 요소는 로스엔젤리스나 런던, 서울에 사는 여성들에 동일하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무난한 에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룩의 중심은 이사벨 마랑의 쉽고 애티튜드한 마술 같은 믹스를 통해 선보인다. 예를 들어 슬림한 진과 티셔츠, 패전트 블라우스와 레이스 미니 드레스, 프린지 부츠와 가방의 조합 등이다.
그녀의 성공 비결에 대해 말할 때 보통 상승은 느리지만 꾸준했으며 매우 가족적이었다는 점을 든다. 가족적이라는 의미는 회사가 온전히 그녀의 통제 아래 있을 뿐 아니라 회사의 CEO인 소피 두루플레(Sophie Durufle)는 그녀의 전 시누이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성공 레시피는 보헤미안 시크와 파리지엥 쿨에 뿌리를 둔 잘 정리된 일관성 있는 패션 미학으로 착용성, 앞서가는 콘템포러리 가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랑 자신의 끊임없는 추진력을 갖춘 현재의 유행보다 한 발 앞선 디자인을 혼합한 옷으로 정의할 수 있다. 소피 두루플레 CEO에 의하면 이사벨 마랑은 일을 하기 위해 제일 먼저 회사에 출근하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퇴근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사벨 마랑을 성공 스토리를 구축한 비결은 바로 뛰어난 명료함과 집중력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 베르소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그녀는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절대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주얼리 컬렉션부터 시작했다. 이유는 의류 컬렉션을 런칭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 마랑은 1989년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두려움 없는 추진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회사를 경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 당신이 진정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둘러 싸여 자랐다.
디자이너로서 견인력을 일찍 찾아왔다. 비록 처음에는 브랜드에 무엇인가 내부자의 비밀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1994년에 첫 패션쇼를 시작했을 때 처음 한 두해동안 그의 고객은 단지 친구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녀의 컬렉션 작업의 완성도는 손색이 없었지만 독특하거나 역사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들이 그녀의 패션쇼 장에 오지 않았다. 그녀의 동료들의 작업은 아마도 더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러나 그 옷들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컬렉션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다루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첫 패션쇼부터 판매가 이루어졌다. 반면 다른 동료들의 옷은 팔리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돈을 단지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쇼에 지출했다고 지적했다.
이사벨 마랑은 기자의 관심을 피한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프레스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나의 회사를 세팅해 잘 돌아가게 만들고 난 후에 에디터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더 멋진 일이라는 확신에 강한 믿음이 있었다.
브랜드 초창기에 이사벨 마랑은 오로지 입소문을 통해 지방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벨 마랑은 프랑스에 판매처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단지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거실에서 개인적인 판매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차례로 그들의 친구 여러 명을 자신의 거실로 데려왔다. 결국 오래지 않아 약 400명의 고객 리스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 내부 사람들의 마켓만으로는 그녀의 비즈니스를 괄목할만한 방법으로 시동을 걸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초기의 마랑의 브랜드를 실제로 돌아가게 한 것은 바로 일본 시장이었다. 그녀는 당시를 회사하며 스스로 운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회사는 실질적인 일본 리테일러를 만날 수 있었고 바잉하는 양이 대규모라서 브랜드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매번 큰 규모의 오더를 했다고 한다.
당시 그녀가 주문을 처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클라이언트가 미리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보통 젊은 디자이너들을 괴롭히는 현금 흐름 문제를 어떻게 스스로 해결했는지를 설명했다. 주문이 확인되면 그녀는 배송하기 전에 그녀에게 먼저 돈을 지불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했다. 결국 그 선금으로 원단과 기타 등등에 투자를 할 수 있어 무리 없이 회사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사벨 마랑의 컬렉션이 처음부터 주문을 잘 받은 이유의 일부는 그녀의 패션 미학이 당시 패션에서 일반적인 것과 달리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가 보여준 룩은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헬무트 랑에게서 영향을 받은 아주 깔끔한 미니멀리즘과는 아주 달랐다. 그녀의 물건은 강한 에스닉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컬렉션도 그녀 스스로의 진화와 함께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작업과 밀접한 편안한 소재와 스페셜 컬러와 함께 공명하고 있다.
자신의 비즈니스에 있어 상업적인 기반을 구축한 후 그녀는 자신의 브랜드를 개발할 적절한 시간이 되었음을 스스로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너무 크게, 너무 빨리 얻기 전에 먼저 매우 합리적인 비즈니스를 세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돌을 하나하나 쌓는 기분으로 회사를 키우고 싶었고 그 결과 회사의 기반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결국 딱 한번만 회사를 운영했고 지금은 이미지에 공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고객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이사벨 마랑은 초창기부터 견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플랜은 중반기부터 실제로 추진되었다. 마랑 크레딧의 터닝 포인트를 통해 스타일링과 PR 등 두 명의 중요한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사벨 마랑이 프랑스판 <보그> 에디터로 일하고 있던 엠마누엘 알트에게 자신의 쇼를 스타일링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감히 그녀에게 말 걸기도 어려웠다고 회상한다. 이사벨 마랑이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엠마누엘 알트의 남편인 아트 디렉터 프랭크 두랜드를 통해 요청을 했을 때 둘은 서로 너무 재미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둘은 동갑이었고 같은 패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공동 작업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현재 엠마누엘 알트는 프랑스 <보그>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며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이사벨 마랑의 컬렉션을 스타일링했다.
회사 설립 이후, 이사벨 마랑은 같은 프레스 책임자와 일했다. 의리 있는 그녀는 회사가 막 시작을 했을 때 프리랜서로 이사벨 마랑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벨 마랑 브랜드가 프로필 측면에서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패션쇼의 프론트 로우에는 호기심 없는 인터내셔널 에디터만 남아 있었다. 이사벨 마랑을 위해 두 번의 쇼를 스타일링한 후 엘마누엘 알트는 이사벨 마랑에게 자신과 함께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면 그녀의 프레스 리프리젠테이션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 엠마누엘 알트는 그녀에게 스타일닷컴에 마랑의 쇼가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전 세계에서 온 중요한 프레스 피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실은 이사벨 마랑이 도달한 수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라고도 말했다.
엠마누엘 알트를 잃는 것을 두려워 한 이사벨 마랑은 오늘날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프레스 에이전시에 브랜드 홍보를 맡겼다. 이에 대해 소피 두루플레 CEO는 작업을 함께 할 프레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단지 한 시즌 만에 패션쇼 관객들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변화는 숫자보다 비주얼적인 측면이 더 컸다. 숫자는 이미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사벨 마랑은 훌륭한 비즈니스를 가지게 되었고 엠마누엘 알트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사벨 마랑의 저렴한 보급판 컬렉션은 2000년에 런칭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스타일링이었다. 이사벨 마랑의 작업에 섹스의 바이탈 주입을 추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엠마누엘 알트는 이사벨의 여성의 매력을 발뒤꿈치에 놓았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고 두루플레가 말했고 이사벨 마랑도 동의했다. 옷은 변하지 않았지만 엠마누엘 알트는 타이트한 스웨이드 큐리사(허벅지 부츠) 한 켤레를 가지고 왔고 그 작은 결정은 옷이 나타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을 뿐 아니라 고객들이 이사벨 마랑 브랜드를 인지하게 만들었다. 부츠는 패션쇼를 훨씬 더 글래머러스하고 섹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사벨 마랑 브랜드는 프랑스와 이태리와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유명해진 사이 미국과 영국과 같은 주요 마켓에서는 존재감이 아주 미약했다. 실제로 스타일링과 커뮤니케이션에 변화를 준 후 미국 시장 확장은 브랜드를 위한 또 다른 핵심 촉매제가 되었다. 디자이너 이사벨 마랑은 미국 마켓의 급속한 홀 세일 성장을 하고 있던 2010년 자신의 첫 번째 독립 매장인 뉴욕 매장을 오픈했다. 현재 미국 시장의 마랑 비즈니스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다행히 여성의 취향의 변화의 정점과 일치하는 확장을 통해 보여준 구찌의 톰 포드와 이브 생 로랑의 의해 주도된 2000년대 초반의 오버 섹슈얼적인 미학에서 벗어난 마랑의 초기의 보헤미안 시크 룩에 대한 추구는 여전히 섹시하고 세련되었다.
이사벨 마랑은 다수의 빅 히트 아이템이 출시했고 베켓(Bekett)으로 알려진 유비쿼터스 히든 웨지 스니커즈는 브랜드가 2009년에 론칭한 것으로 이후 매 시즌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자신의 성공 엔진으로서의 중요성을 덜 중요하게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자신의 성공시킨 것은 하나의 특정한 아이템이 아니라 자신를 정의하게 만들고 아울러 사람들이 요구한 실루엣이 전부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숫자가 그 자체를 말해준다. 스니커즈 성공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에는 파리에서만 일주일 만에 100켤레의 신발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현재는 10켤레 정도로 줄어들었다. 유명세일지는 몰라도 그 신발이 마이클 코어스, 호간, 아디다스 등에서 카피를 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는 약간 억울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이사벨 마랑 비즈니스에서 액세서리는 3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그녀의 가장 큰 시장은 유럽과 아시아다. 아시아에서도 한국에서의 존재감이 강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온라인 판매는 눈부신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데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강세다. 사실 이사벨 마랑은 아직 자신들만의 전자상거래 매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온라인으로만 수익의 40%를 올리고 있다. 미래에도 미국 시장은 브랜드의 핵심으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벨 마랑은 12월에 샌 프란시스코에 새 매장을 오픈하면서 미국 내 리테일 네트워크를 계속 확장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세 가지를 강조한다. 먼저 회사의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두 번째로 집중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디자인을 하는 자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하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디자이너들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구체적이면서 정상적인 메시지를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스스로 입고 싶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결코 디자인하지 마세요."라고 강조한다. 학창 시절 자신의 스승이 일러준 충고를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는 것은 그 충고가 명언이 아닌 현실적인 성공의 비결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글 유재부 패션평론가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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