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 2014-10-22 |
故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전설은 계속된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제자 오스카 드 라 렌타가 결국 82세의 나이로 스승이 있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화려한 테크닉으로 미국 퍼스트레이디와 할라우드 스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친절한 매력으로 세계 패션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타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미국 패션 역사에서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는 전설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와 이국적이고 화려한 디자인, 여성스럽고 우아한 의상으로 1960년대부터 사랑을 받아온 그의 작품들은 고향인 카르브해의 자연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늘 패션쇼를 통해 항상 자수, 꽃무늬, 털 장식, 러플 장식, 구슬 장식, 라틴 풍을 포함한 이국적 디테일은 유럽에 비해 뒤쳐져 있던 미국의 드레스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특히 우아함과 여성미를 강조하기 위해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소재나 재킷도 칼라를 잘라내고 여성의 몸매가 드러나도록 재단하거나 꽃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드 라 렌타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오스카 드 라 렌타는 1932년 1932년 7월 22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 도밍고에서 태어났다. 보험 사업을 통해 도미니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아버지는 와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길 바랐지만,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립 예술 학교를 거쳐, 1951년 17세의 나이에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아카데미 오브 산 페르난도에 진학해 미술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미술 공부를 지지해 주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러 받으러 도미니카로 돌아올 것을 요구받지만 그는 미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패션 디자이너들의 드레스를 잡지 광고용 스케치로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사이드로 시작하게 된다. 그의 탁월한 스케치를 눈여겨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그를 채용해 전 세계 고객들에게 보낼 카탈로그용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게 했다.
그러던 중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이 그가 그린 스케치를 스페인 주재 미국 대사 부인인 베아트리체 코봇 롯지 여사에게 보냈고, 스케치를 본 그녀는 처음 사교계에 나가는 딸의 드레스 디자인을 오스카 드 라 렌타에게 의뢰한다. 그의 첫 작품인 풍성한 화이트 드레스는 큰 호응을 얻어 1956년 <라이프> 매거진의 표지에 실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발렌시아가 밑으로 들어가 도제식으로 패션 디자인을 배우게 된다. 이후 그는 파리에 있는 랑방의 안토니오 카스텔로 밑에서 쿠튀르 조수로 일을 시작하면서 쿠튀르 적인 테크닉을 배우게 된다.
그는 살아생전 기성복 디자이너였지만 랑방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늘 쿠튀르적인 디테일을 선보였다. 변화하는 트렌드와 관계없이 그의 옷은 항상 쿠튀르적이고 여성의 몸을 내추럴한 형태가 허용하는 것 보다 더 완벽하고 백조 같이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는 2005년
오스카 드 라 렌타를 1963년 뉴욕으로 가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다이애나 브릴랜드였다. 그는 브릴랜드를 만나기 전 미국 출장 중에 엘리자베스 아덴을 디너파티에서 우연히 만났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대화를 통해 그에게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합니다. 엘리자베스 아덴과 크리스찬 디올의 기성복 디자이너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에게 당시 미국 <보그> 편집장이던 다이애나 브릴랜드는 “엘리자베스 아덴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때문에 그녀는 당신을 더 빛나게 해줄 것이다. 디올로 갈 경우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이름이 브랜드 명성에 가려질 것이다.”라고 조언하며 그에게 미국에서의 활동을 제안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아덴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엘리자베스 아덴 바이 오스카 드 라 렌타’라는 이름으로 미국 상류층 여성을 위한 의 맞춤복 디자인을 선보여 미국 상ㄹ층 여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2년 후인 1965년 기성복 디자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제인 더비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다. 드디어 '오스카 드 라 렌타(Oscar de la Renta)'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표를 부착한 우아한 제품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하지만 같이 일을 시작한지 2년 후 사로 제인 도비는 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더비를 대신해 오스카 드 라 렌타가 회사를 인수한다.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한 후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60년대 후반 두 번의 코티 전미패션비평가상(The Coty American Fashion Critics’ Award)을 수상했다. 그 첫 번째는 1967년의 러시안 룩으로, 바닥까지 내려오는 코트, 털 장식, 화려한 문양과 보석 장식이 가득한 컬렉션이었다. 이 컬렉션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삼촌의 친구였던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받은 영감들이 들어 있었다. 이어 1968년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행한 의복에서 영감을 얻은 벨 에포크 룩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이 컬렉션이 인기를 끌었던 데에는 존 F. 케네디나 마틴 루서 킹과 같은 저명인사의 저격 사건, 각종 인권 운동의 활성화, 베트남전 반대의 물결 등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적 상황이 그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회사는 1969년에 리치턴에 매입되어, 미국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회사가 된다. 그는 당시 쿠튀르, 기성복 부티크, 모피, 장신구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리치턴에게 주요 결정권을 빼앗겼던 그는 재투자를 통해 1973년 회사의 핵심 결정권을 다시 되찾게 된다.
이후 오스카 드 라 렌타는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 아시아, 남미까지 진출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92년부터 프랑스 럭셔리 하우스 피에르 발맹의 디자인을 책임지게 된다. 1970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상태였던 그는 프랑스 럭셔리 하우스의 디자인을 맡은 최초의 미국인이다. 그는 2002년까지 피에르 발맹의 디자인을 맡아 자신의 쿠틔르적인 패션 미학을 과시해 그 공로로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French Legion of Honour) 훈장을 받았다. 주로 내국인에게만 수여하는 이 훈장을 외국인인 그가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갑작스러운 타계에 미국 사회가 슬퍼할 정도로 그는 미국 상류층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디자이너였다. 그의 주요 고객으로는 사라 제시카 파커, 비욘세, 페넬로페 크루즈 등의 할리우드 스타들은 물론, 영국 앤드류 왕자의 전 부인인 사라 퍼거슨, 스웨덴의 마들렌 공주 등의 왕족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낸시 레이건,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 등의 퍼스트레이디들이 있다. 할리우드 스타 출신의 낸시 레이건은 날씬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1989년 CFDA 공로상을 받았다.
힐러리 클린턴은 드 라 렌타의 도움으로 검정색 의상의 딱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화사하며 여성스러운 색채와 소재를 이용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다시 검은색 의상을 착용하고 나타나 그를 화나게 했다. 클린턴에 이어 로라 부시 또한 드 라 렌타의 의상을 애용했다. 그녀는 딸과 함께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뉴욕 쇼룸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2008년에는 결혼식을 위해 딸의 웨딩드레스와 본인의 드레스 디자인을 직접 의뢰할 정도로 그의 디자인을 좋아했다.
반면 미셸 오바마는 이전의 영부인과는 달리 비교적 저렴한 신진 디자이너의 의상이나 제이크루(J.Crew)와 같은 대중적 상표의 의상을 애용하곤 하는데, 이를 두고 드 라 렌타는 영부인이 미국 패션업계의 활성화를 위해 고가의 디자이너 작품을 착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녀가 영국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 세 여왕을 만났을 때 카디건을 착용한 모습을 두고 크게 비난하여, 역으로 대중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미셸 오바마가 드 라 렌타의 아들인 모이세스의 의상을 착용하여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모이세스는 2004년 그의 아버지의 컬렉션을 위해 티셔츠를 디자인한 이래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2009년 MDLR이라는 캐주얼 브랜드를 런칭했다. 하지만 최근 미셸 오바마가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드레스를 입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미셸은 오스카 드 라 렌타 생전에 최고의 선물을 한 퍼스트레이디가 된 셈이다.
오스카 드 라 렌타의 성공에는 아내의 역할도 컸다. 그는 1967년 자신에게 다이애나 브릴랜드를 소개해주어 미국행을 감행해게 도와준 프랑스 <보그> 편집장이었던 프랑수아즈 드 랑글라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잡지사에서 일하기 전 초현실주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엘사 스키아파렐리에서 일했기 때문에 패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오스카 드 라 렌타와의 결혼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해 엘리자베스 아덴의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뉴욕 사교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녀는 남편의 디자인에 대해 공정한 비평가의 입장을 고수했지만, 사교계 인사들과의 인적 관계를 통한홍보 효과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83년까지 그의 사업 확장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오스카 드 라 렌타는 1989년 사교계 인사이자 오랜 친구인 아네트 리드와 재혼했다. 그녀의 딸 중 한 명인 엘리자 리드 볼렌과 사위인 알렉스 볼렌은 오스카 드 라 렌타 사업에 관여했다. 볼렌은 원래 월 가의 경영진이었는데, 1995년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라이센싱 부서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오스카 드 라 렌타의 CEO가 되었다.
오스카 드 라 렌타는 활발한 자선 사업과 예술 분야에의 후원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82년 어린이들을 위한 안식처인 라 카사 델 니뇨의 건립과 운영을 위해 상당 액수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관에서는 무료 보육원을 운영함은 물론 각종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첫 번째 부인인 프랑수아즈의 죽음으로 외로웠던 그는 이곳을 통해 아들 모이세스도 입양했다. 또한 그는 ‘마미 앤 미’ 드레스 라인을 출시해 엄마와 어린 딸이 같은 디자인의 옷을 살 경우 어린이 드레스 각 아이템의 매출 당 100달러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자동 기부되도록 했다.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그는 메트로폴탄 오페라, 뉴욕 오페라 하우스, 카네기홀, 히스패닉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기관과 단체의 후원자로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 이미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96년에는 히스패닉 문화유산 재단으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오스카 드 라 렌타는 1973년에서 1976년까지, 또 1987년에서 198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패션디자이너 협회(CFDA)의 회장을 역임했다. 당시 많은 디자이너들이 향수 사업에 진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협회 회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화장품 업체인 코티와의 이권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CFDA만의 독자적 상인 ‘CFDA 어워드’를 만들어 패션디자이너들의 자유로운 사업 확장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 역시 1977년 ‘오스카 드 라 렌타’라는 이름의 향수를 출시하여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그는 이 제품으로 1991년 향수재단 장수 상을 받았고, 1995년에는 미국 향수협회의 ‘살아있는 전설’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자신이 만든 CFDA 어워드의 공로상을, 2000년과 2007년에는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을 받기도 했다.
인생이라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이브 생 로랑 이후 또 하나의 패션계 별이 우리와 작별을 고했지만 스타일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의 패션은 후배 디자이너들에 의해 다시금 클래식으로 부활할 것이다. 20세기 패션을 화려하게 만들었던 아트 디자이너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유산의 소중함을, 그리고 패션 판타지의 영원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패션엔 유재부 기자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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