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4-02-27

게임의 법칙

게임의 법칙이란 동등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만 공정성과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하지만 경력과 인지도, 추구하는 세계가 천차만별인 선후배 디자이너들을 동일 선상에 올려 놓고 동일한 잣대로 심사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게임의 법칙이다. 이미 누가 승리할 지 뻔히 보이는, 소위 정답이 나와 있는 게임은 비정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을 게임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이 직접 만들어야 제대로 된 게임을 할 수 있다.



얼마 전 끝난 2014 소치 겨울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은메달에 대해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 언론도 심사 위원들의 부당한 평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정작 본인은 홈 텃세도 경기의 일부라며 기꺼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제3자가 나서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동안 올림픽에서 심사에 대한 많은 이의 제기가 다소 있었지만 이렇게 전 세계가 일제히 반기를 든 것은 이례적이다. 이해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보기에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축구나 야구 같이 골을 넣으면 승리할 수 있는 구기 종목이나 빨리 달리면 승리할 수 있는 기록경기와 달리 피겨 스케이팅에는 예술 점수라는 것이 있다. 예술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임에도 찰나의 순간에서 받은 인상을 계량화한 숫자로 평가하는 것이 에술 점수다. 예술에 순위를 매기는 행위가 공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지 모른다. 인간은 컴퓨터나 신이 아니다. 사람의 팔이 밖으로 굽지 않고 안으로 굽는 이유는 이타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이미 어느 정도 홈 텃세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했었고 홈그라운드 프리미엄은 러시아 선수가 가져갈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인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분노하는 이유는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하기엔 너무 편파적인 심사 결과 때문일 것이다. 너무 눈에 띄게 편파 판정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감수하겠다는 희생 정신도 승복할 수 없는 억울함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김연아는 잘못된 심사의 희생양이라고 본다.



지난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2014 가을/겨울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할 디자이너 심사가 진행되었다. 사실 디자이너의 컬렉션 참가 자격을 심사한다는 것은 전 세계 어느 컬렉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다. 그런데 유독 서울에서만 심사를 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있다. 서울시의 지원(정확하게는 예산)을 받아 진행되는 서울 패션 위크는 주최 측인 서울시가 갑이다. 서울시의 주장에 따르면 패션쇼를 할 수 있는 회수는 제한적인데 패션쇼를 하려는 디자이너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사를 통해 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심사를 받기 싫으면 자비로 따로 패션쇼를 가지라는 소위 똥배짱이다. 그럼 서울시에 묻고 싶다. 서울 패션 위크는 누구를 위한 행사냐고. 서울 컬렉션이 시작된 지 15년째를 맞은 지금도 서울 시민들을 위한 문화 행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그동안 기성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심사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다. 개성을 중시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을 획일화된 잣대로 심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주장이었다. 개인적인 취향과 기준에 따라 예술을 보는 시각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이를 개량화된 점수로 매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서울 패션 위크 디자이너 선정 심사에 참가한 적이 있는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다. 학계와 프레스, 바이어, 패션 유관 단체에서 무작위로 뽑은 심사위원들은 주어진 2~3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디자이너들이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심사한다. 제대로 된 심사라고 한다면 PT가 있어야 할 텐데 대충 생략이다. 서로 아는 처지에 갑과 을로 얼굴을 맞대면 이는 대략 난감이다. 결국 선후배 디자이너들은 검투사가 되어 링 위에서 계급장을 뗀 명분없는 결투를 벌이고 서울시는 게임을 구경하듯 누가 승리할지 결과만 궁금하다. 소위 녹을 먹는 나랏님의 자세는 아닌 듯 싶다.


보통 서울 패션 위크의 디자인 심사의 경우 정량 평가와 정성 평가 점수를 합산해 총점을 낸 다음 순위에 따라 패션쇼를 할 수 있는 인원 수 만큼 통과시킨다. 여기에서 정량 평가는 제출한 서류를 바탕으로 미리 주최 측에서 점수를 계산해 놓은 다음 심사 당일 심사위원들의 정성 평가 점수를 합쳐 총점을 내기 때문에 정성 평가는 심사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심사위원들이 과연 참가 신청서를 낸 디자이너들을 모두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이름이 알려진 기성 디자이너나 혹은 대중적 인지도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은 선거판처럼 소위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거나 그야말로 신인의 경우 불이익을 당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패션쇼에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심사 제도가 오히려 패션쇼를 제도적으로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장벽이 된 셈이다. 

잠깐 영화판을 가보자. 영화가 개봉되기 전 프레스와 평론가들에 미리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사회라는 것을 가진다. 영화를 본 영화 관련 기자들과 영화 평론가들의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별점도 전차만별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이라는 잣대로 어떤 이는 대박을 예상하고, 어떤 이는 쪽박을 예상한다. 하지만 기준과 취향의 차이일 뿐 그들 중 정답은 없다. 정작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개봉하고 나면 사전 시사회 평가와 흥행 성적은 대부분 반비례한다. 영화를 보는 관점이 전문가와 관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사전 평가와 관계없이 흥행 기록만이 영화의 최종 기록으로 남게 된다. 사실 1000만 명을 동원했다고 작품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단 1만 명만 봤다고 해서 작품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확일적인 심사 제도 때문에 소비자들이 찾고 있는 진짜 실력있는 디자이너가 누락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유행이라는 변수가 강하게 작용하는 패션에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패션에 점수를 매긴다? 패션도 일종의 예술인데 계량화된 점수를 낸다는 것이 옷을 만드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보통 디자이너들을 평가할 때 등장하는 단골 항목이 독창성, 상품성, 글로벌 경쟁력 등 세 가지다. 하지만 항목이 너무 모호하고 광범위하다. 구체적인 기준도 없다. 독창성의 경우 어떤 잣대를 들이 대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개연성이 높다. 같은 장소에서 함께 본 패션쇼도 호불호가 갈릴 정도로 패션은 주관적 영역이다. 상품성과 글로벌 경쟁력도 마찬가지다. 팔리지도 않을 작품을 만들 패션 디자이너가 어디 있는가? 글로벌 경쟁력은 더 모호하다. 세계 시장에 나가서 각광을 받을지 않을지는 나가봐야 아는 것이지 회의실에 앉아서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디자이너들이 제출한 10장의 포트폴리오만 보고 위의 세 가지 항목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프리젠테이션도 없이 진행되는 심사가 가지는 한계다. 런던이나 뉴욕 패션에서 보듯 패션의 힘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차제에 심사 제도를 없애거나 대폭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 다양성을 포용해야만 K패션은 창조 경제의 한 축으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과 런던, 밀라노, 파리 컬렉션이 끝나면 거의 시즌 장사는 끝났다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해외 프레스나 바이어들이 도쿄나 상하이 컬렉션을 찾는 이유는 4대 패션 캐피탈에는 없는 유니크한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서울 역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인 디자이너들의 무대인 GN 컬렉션의 경우도 지난해부터 심사에 대한 이런저런 말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심사위원 구성에 대한 불만들이다. 애초 서울 패션 위크 디자이너 선정 심사위원에는 디자이너들이 당사자이기 때문에 배제했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GN 컬렉션에 한해 선배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제안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가 했다. 신진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관록있는 기성 디자이너들이 심사를 해야 한다는 취지였고 서울시 역시 흔쾌히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초기에는 이신우나 박윤수 같은 기성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제 모습을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부 심사위원에 대한 적격성 논란이 일고 있다. 즉 누가 누구를 심사하느냐는 볼멘 소리다. 어느 순간부터 신인 급 디자이너들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면서 심사를 받는 같은 급의 신인 디자이너들이 자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들보다 20~30년 앞서 디자인을 시작한 선배 디자이너들도 아니고 운 좋게 스타디자이너로 급부상한 신인 디자이너에게 심사를 받는 신인 디자이너들의 기분이 그리 유쾌할 리 없다. GN 컬렉션의 심사의 경우 심사위원 앞에 서서 마치 대기업 면접을 보는 것처럼 단체로 심사를 받기 때문에 소위 쪽이 팔릴 수도 있다. 또한 서류에 기업의 정보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알몸으로 서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급의 디자이너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갑을관계로 바뀌어 버리니 스스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기성 디자이너와 달리 제대로 된 신인을 뽑기 위해 심사가 필요악이라면 심사를 받는 신인 디자이너들이 존경하고 인정할 수 있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심사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을 공개하지 않는 점도 문제다. 서울시는 사전에 심사위원을 발표하면 디자이너들이 사전 로비를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요즘 세상에 어떤 디자이너가 심사위원을 대상으로 로비를 한다는 말인가. 이런 발상 자체가 대한민국 디자이너에게는 모욕일지 모른다. 심사 하루 전날에 참석 여부를 묻는 것도 문제다. 보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바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루 전에 전화를 해서 시간을 내라는 것은 결례에 가깝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능력이나 인지도가 아닌 시간이 되는 사람만이 심사를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심사 위원 공개는 투명한 심사의 시작일 뿐 아니라 심사를 받는 디자이너들 역시 적어도 불공정 심사라는 색안경을 거둘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심사위원 역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심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법칙이란 동등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만 공정성과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에서는 같은 조건을 만들어 그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겨룰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올림픽 정신이다. 공정한 룰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력과 인지도, 추구하는 세계가 천차만별인 선후배 디자이너들을 동일 선상에 올려 놓고 컬렉션 참가 자격을 심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게임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누가 승리할 지 뻔히 보이는, 소위 정답이 나와 있는 상태에서의 게임은 비정상적인 게임이다. 비정상의 정상을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 때 게임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의 직접 만들어야 제대로 된 게임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편의주의적 전시행정 때문에 소위 들러리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벌써 2월도 다가고 내달 21일부터 열리는 서울 패션 위크가 채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여전히 참가 디자이너와 스케줄은 오리무중인 가운데 패션쇼를 준비하는 디자이너들은 답답하기만 한다. 시즌 전에 제품을 미리 선보여 바이어와 프레스에게 상품력에 대한 평가를 받고 이를 고객들에게 홍보해야 하기 때문에 1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아직 심사 때문에 스케줄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라 쇼를 준비하는 디자이너들은 멘붕이다. 초대장을 보내야 하는데 아직 일정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설사 심사를 통과해도 홍보 시간이 촉박해 패션쇼 자리 채우는 것도 고민이다. 꿈조차 꾸기 싫은 상황이지만 만약 심사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동안 패션쇼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에 요 며칠사이 디자이너의 속은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묻지마 심사에 깜깜이 스케줄까지 이번 서울 패션 위크의 최대 피해자는 패션 디자이너다. 이번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10월 행사를 위해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야한다. 물론 규칙은 게임을 즐길 디자이너들의 몫이다. 서울 패션 위크에서 서울시는 '주체'가 아닌 '주최'라는 사실을 인식해 주길 바라면서 이만 총총.  

유재부 패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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