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 2013-12-17 |
만델라의 뉴룩 '마디바 셔츠'
평화와 인권 그리고 용기와 자유, 화해의 삶을 살다간 고 넬슨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가 남긴 이념적 뉴룩 ‘마디바 셔츠’의 의미를 집어 본다.
지난 12월 6일 95세의 나이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고향인 이스턴케이프 주 쿠누에서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4천5백여 명의 추도객이 참석한 장례식은 21발의 예포 발사와 함께 남아공 국기로 덮은 만델라의 관을 운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만델라의 출신 부족인 코사족은 ‘당신은 약속을 지켰다’라는 찬송가로 그의 용기와 자유, 화해의 삶을 찬양하며 "굿바이 마디바"를 외쳤습니다.
지난 10일에 열린 영결식에서는 만델라가 그토록 원하던 무지개처럼 전 세계에서 온 100명의 국가 정상들과 함께 흑인·백인·동양인 등 다양한 추모객이 인종과 종파를 넘어 함께 어우러져 그의 애칭 ‘마디바’를 외쳤습니다. ‘마디바’란, 남아프리카 코사족이 존경하는 어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를 보내면서 평생 그의 화두였던 화해와 자유, 평등의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된 마디바 셔츠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디바 셔츠는 그가 정치적인 집회를 위해 대중들 앞에 나설 때 입었던 밝은 컬러 톤의 프린트 셔츠로 그의 별명을 붙여 일명 ‘바디바 셔츠’로 부릅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화려한 프린트의 마디바 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는 만델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마디바 셔츠는 만델라의 개인적인 스타일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지 스타일적인 의미 그 이상의 정치적, 이념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계적인들에게 1994년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 취임식 때 입었던 클래식한 쓰리 피스 수트로 처음 주목을 받았지만 그는 대통령에 재직하는 동안 정치적인 파워의 보편적인 상징인 테일러드 수트나 넥타이, 콧대 높은 셔츠를 거부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권위주의 탈피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마디바 셔츠였던 것입니다.
권위주의를 타파에 대한 변화는 그가 대통령이 된 지 몇 주 만에 옷차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남아공의 첫 민주적인 의회 개회식을 위해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 그는 회색 수트가 아닌 마디바 셔츠를 입고 등장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디바 셔츠를 입은 만델라의 모습은 그만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보도 사진은 물론 심지어 마담 튀소 밀랍 인형 박물관의 밀랍인형이나 최근에 세워진 동상에서도 마디바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심플한 바지와 함께 입은 밝은 컬러의 비비드한 패턴의 길이가 다소 긴 마디바 셔츠 스타일은 유일한 호사는 종종 포켓에 펜을 꼽는 것일 정도로 서민적이고 소탈한 이미지를 좋아했습니다. 아마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무지개의 나라’ 남아공을 상징하는 의미도 숨어 있었겠지요.
마디바 셔츠에 고기 디자인이나 꽃과 새 등 다양한 스타일의 패턴을 선보이자 <BBC> 방송은 “남아공 정치에 패션 혁명의 길을 열었다”고 극찬했고 남아공 패션지 <스타일>의 앤드류 도날슨 기자는 “그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룩을 선물했다”는 한 문장으로 마디바 셔츠를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디올의 뉴룩에 버금가는 정치적인 의미의 뉴룩이었던 셈입니다. 단지 한 장의 셔츠였지만 넬슨 만델라를 떠나보낸 지금, 마디바 셔츠는 포스트 아라파트 헤이트의 상징이 되어 세계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레이 수트가 여전히 건재한 보수적인 세계 정치 환경에서 마디바 셔츠는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기에 충분했습니다. 체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세계의 청년들이 체 게바라의 민중에 대한 헌신성과 혁명에 대한 열정을 기억하는 것처럼, 마디바 셔츠를 입으면서 그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델라는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이나 미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같은 국가 정상들을 만날 때도 늘 마디바 셔츠를 입었다고 합니다. 1996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만남을 앞주고 여왕이 그를 위해 특별히 아르마니 수트를 준비했지만 그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대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마디바 셔츠 중 하나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만델라의 이름은 패션계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바로 연관 검색어에 함께 오르는 흑인 모델 나오미 캠벨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0년 6월, 뉴욕의 한 자선 행사장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따스한 햇살 한줄기가 나에게 비춰지는 기분이었다.”며 당시 스무 살이었던 나오미는 2008년 <보그> 남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후 나오미는 만델라가 주도하는 ANC를 후원하는가 한편, 자선 재단 ‘46664(만델라의 죄수번호)’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히드로 공항 폭행 사건에 휘말리고, 46664 로고 모자를 쓴 채 경찰에 출두했을 때는 두 사람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나오미 캠벨 에게 실망한 만델라는 자신의 90번째 생일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만델라의 ‘자랑스러운 손녀딸’이자 만델라는 캠벨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대부’였음에는 장례식에서 슬피 우는 캠벨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넬슨 만델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과 평화 등 여러 가지 정치적인 업적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넬슨 만델라가 입었던 마디바 티셔츠를 볼 때마다 그를 연상할 수 있어 마디바 셔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론 저작권 때문에 남아공 내에서는 약간의 다툼(?)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마디바 셔츠에 대한 기억은 다툼이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단 하나의 목표에 매달렸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철폐에 평생을 바친 그를 우리는 세계인권운동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1990년 27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끝낸 만델라를 맞이하려고 교도소 앞으로 몰려온 건 단지 흑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남아공 백인들과 세계인들 역시 환호했습니다. 흑백차별 종식을 위해 30년 가까운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던 만델라에게는 두 배로 특별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화해와 용서의 상징, 불굴의 의지로 30년 가까운 수감생활을 이겨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잇단 병원 입원을 지켜보며 남아공 국민들은 올 봄부터 마음을 졸였지만 죽음 앞에서도 만델라는 투사였습니다. 인공 호흡기를 거부한 채 임종 직전까지 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니까요.
1918년 템부 족 족장 집안에 태어난 만델라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처한 상황에 눈을 떴습니다. 흑인이 차별받고 테러당하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남아공 국민의 92%가 흑인이었고 백인은 단지 8%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백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권리를 독점했습니다. 흑인에게는 투표권도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토지소유권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곧 인권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1962년 불법 국외여행과 폭동조장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격정적인 투사였던 만델라는 교도소에서 한 단계 더 성장했습니다. 좁은 감방에서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견디며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법, 적을 협상상대로 인정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1980년대,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국제사회의 만델라 석방 요구도 강해지자 남아공 정부는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ANC 내부 반발 속에서 진행된 협상이었지만 만델라는 흔들리지 않았고 백인정권은 결국 만델라를 비롯한 리보니아 재판 피고들을 전원 석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73세 되던 해인 1990년 그는 풀려났습니다. 무려 27년6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날은 만델라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남아공 흑인 모두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출옥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백인정부와의 협상은 더뎠고 남아공에서는 정치폭력이 계속됐지만 만델라는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아공 최초의 민주적 총선을 통해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흑백 혼합 정부를 구성하고,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임기를 마친 만델라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고향으로 물러나 빈곤 퇴치운동, 에이즈 퇴치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고 2013년 12월 자유와 평화를 향한 투쟁을 마무리하고 결국 올 12월 영면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그는 마디바 셔츠를 입은 밝은 미소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패션엔 유재부 대기자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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