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4-02-10

조선의 신세대 오렌지족, 모던걸과 모던보이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유행에 눈을 뜬 신세대가 있었으니 바로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었다. 소위 일제 시대의 오렌지족으로 불리던 이들 신세대의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을 통해 살아있는 생물로서의 패션을 생각해 본다.


   

 

일제 식민지인 1930년대 경성(지금의 서울)에는 1990년대 오렌지족처럼 신기한 옷을 입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젊은 집단이 있었으니 이들을 모던걸 모던 보이로 불렀다.


당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로 서구 자본주와 근대 문화가 일본을 거쳐 조선에 까지 상륙했다. 근대 도시로 변신한 조선의 경성은 화려한 불빛으로 시골뜨기를 유혹하고 새로운 문명과 소비 문화를 즐기는 모던 커플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근대 문화를 향유하게 된다. 이름하여 모던 걸 & 모던 보이 전성시대의 개막이었다.


지금의 강남과 강북처럼 30년대 경성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다. 청계천을 경계로 충무로와 명동 같은 남산 기슭의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남촌이 형성되었고, 북쪽으로는 조선인 상가가 많았던 종로를 중심으로 북촌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전근대적인 북촌과 달리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부근)를 중심으로 남촌에는 화려한 고층 건물과 백화점, 네온 사인으로 뒤덮인 근대 도시가 발전했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진고개부터 들렀다고 한다. 모던 걸들이 시골 지주인 일명 봇다리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유혹하는 곳도 진고개였고 유학 온 봇다리의 딸들은 자신을 모던하게 꾸미기 위해 진고개 백화점으로 향했다.

 

당시 모던 걸의 패션과 흐름을 주도한 것은 경성의 여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학교 연합 바자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서구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지방까지 포함 모두 10여 개의 학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여학생들의 손에는 미쓰고시 백화점과 조지야 백화점에서 산 화장품이 들려 있었고 통학하는 전철 안에는 손잡이를 잡고 선 여학생들의 손목에 모던과 부를 과시하는 금 손목 시계와 보석반지가 번쩍였다. 전차 좌석이 텅 비어 있는데도 곧이 앉지 않고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어 손목시계를 자랑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던지 만평 소재로까지 등장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위치한 미쓰코시를 비롯한 백화점들에는 도쿄에서 유행하는 마네킹 걸들을 등장합니다. 이들은 백화점 제품을 입고 충무로를 오갔는데, 이들 마네킹 걸들을 보기 위해 경성의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모두 충무로로 몰려 들었다.


유흥시설도 늘어났다. 북촌에 주로 양반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생들이 나오는 료리집이 많았다면 남촌에는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을 위한 서구식 웨이트리스들이 나오는 카페가 많아 매일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일차적 특징은 패션이었다. 패션을 통해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은 전근대적 가치들과 분명한 선을 그었던 셈이다. 그들의 패션은 전근대적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기성세대로부터 많은 비난과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물론 요즘에도 젊은 세대들에 패션에 대한 기성 세대들은 불만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초기에는 보이시 스타일이, 중반 이후부터는 상 하의가 하나로 된 점퍼 스커트가 유행했다. 원피스 드레스는 대부분 벨트로 마무리되었고 부드럽고 입체적인 카울 네크 라인이 인기였다. 모던 걸들의 짧은 퍼머 머리와 크로슈 착용은 대중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보석 반지와 금 손목 시계를 선호했던 모던걸 패션에서 주목을 끈 것은 짧은 치마와 작은 양산이었다. 60년대 미니 스커트가 난리였다고 하지만 이미 30년대에 짧은 치마가 유행한 셈이다.


쓸모 있는 것은 점점 작아지고 쓸데없는 것은 점점 커진다는 당시 패션에 대한 정의는 여성의 사치에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핸드백과 가방은 엄청나게 큰 반면 머리와 양산, 치마 길이는 무척이나 짧고 작았다.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막는 우산은 작아지고 손에 들고 다니기 위해선 작아져야 할 핸드백이 커지는 경향에 대해 사회는 비판적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그렇다고 실용적이지도 않은 금 시계나 보석반지, 작은 양산과 짧은 치마로 치장한 모던걸 패션은 당시 계급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전철 안에서나 모임에서도 거울과 분첩을 넣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회장을 하는 모습도 모던 걸들이 시초였다. 이런 모던 걸들을 기성 세대는 뻔뻔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자답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화장을 하는 모던 보이들에 대해서도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판을 했다. 아마도 이런 비판의 밑바탕에는 여성은 늘 정숙해야 하며, 남자는 강하고 거칠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남성중심적 사고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겨울철 패션인 여우목도리도 비난을 받았다.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여유목도리를 두른 모던 걸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냉랭하기까지 했다.


당시 모던 걸들은 초가을이 되면 여우 털 뿐 아니라 개털이나 쇠털이건 목에다 두를 수 있는 털이면 모두 목에 둘렀다고 한다. 얼마나 털(?) 사랑이 극성이었던지 구렁이도 털이 있으면 구렁이 가죽도 목에 두르고 나왔을 것이라는 비판하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은 자신의 육체미를 과시했다. 모던 보이는 가슴팍을 다 열어 젖히고, 하체도 거의 드러낸 채 게다를 신은 모습이었고, 모던 걸도 가슴이 거의 드러난 상의에 치마 길이 또한 아슬아슬했다. 기생이나 카페 웨이트리스, 여학생들의 패션은 가슴이 비치거나 가슴만 살짝 가린 상의에 하의로는 초미니 치마에 에이프런만 달랑 걸치는 소위 노출 패션이 유행해 기성 세대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여성교육자 김활란은 인습을 타파하겠다며 1928년 단발머리를 단행한다. 그녀의 상고머리식 단발이 신여성 사이에 유행하자 사회와 언론은 모던 걸은 못된 걸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비판을 했다. 여성의 짧은 머리 하나에도 고난이 있었던 셈이다.


이외에도 요즘 입어도 손색이 없는 최승희 원피스나 여성 비행사 박경원이 쓴 종모양의 모자, 30년대 할리우드 배우들이 입은 투피스도 직장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종로를 활보하는 모던 걸들을 잡종 스타일을 연출하는 천박한 부류로 치부하며 이 정숙하지 못한 요괴들이 늘어난다며 한탄했으며 꽃보다 다리 구경이라는 기사를 통해 모던 걸들의 노출 패션을 비꼬기도 했다.

 

그늘도 있었다. 당시 모던 걸들은 별다른 생활 수단 없이 남에게 기대에 살아가는 기생 성으로 인해 사회적 눈총을 받기도 했다. 이들이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하던 나이 든 남자의 지팡이 구실을 하는 스틱 걸, 졸부들의 다리를 주무르거나 발을 씻겨주는 핸드 걸, 박람회 때 일금 오십 전에 키스를 팔다가 쫓겨난 키스 걸, 화려한 옷차림으로 번화가를 오가는 마네팅 걸도 지탄을 받았다.


또한 거리를 오가며 누군가의 유혹을 기다리는 스트리트 걸은 남의 돈을 구걸한다는 점에서 거지로 분류되기도 했다. 거리로 나선 인텔리 모던 걸들은 화장을 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사내에 이끌려 전차를 바꿔 타고 한끼 식사를 해결했다. 식민지 도시의 빈곤이 여학생 출신 모던 걸들을 유녀의 세계로 내몰았던 것이다.



모던 보이들은 보통 자본가의 아들이자 부르주아의 후예들이었다. 하지만 일찍부터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은 가난한 인텔리들도 모던 보이 행렬에 합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당시 유행하는 중절모자나 백 바지, 뿔태 안경은 걸치지 못해도 양복만큼은 걸쳐야 했기에 고물상 양장점을 찾았다.


머리속으로는 어여쁜 모던 걸과 왈츠와 탱고를 생각하지만 실상은 고물상 양복점에서 구입한 양복에 배고 밴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텔리 실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던 보이 행세는 찻집에 들러 커피 한잔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경성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과 남산 공원은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즐겨 찾았던 데이트 코스였다. 모던 걸들은 모던 보이들을 희롱하고 모던 보이들은 모던 걸들을 유혹했습니다. 모던 보이는 단장을 짚고, 모던 걸들은 양산을 손에 들었다. 개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도 이때부터 생긴 풍습이라고 한다.


모던 커플들은 애완견을 매개로 사랑을 맺고 공원 벤치에서 사랑을 속삭였기 때문이다. 밤 벚꽃놀이가 시작되면 제일먼저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창경원으로 달려갔다.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쳐다보는 모던 보이들과 단장을 거머쥐고 음흉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는 모던 보이들에게 눈짓하는 양산을 든 모던 걸들로 넘쳐났다고.



모던 걸들은 근대의 상징인 도시의 아스팔트를 좋아했다. 그래서 모던 걸들을 아스팔트 딸로 불리기도 했다. 모던 걸들은 아스팔트 거리를 걸으면서 근대적인 교통수단과 높이 솟은 빌딩들과 마주쳤다.


자동차와 전차가 뿜어내는 소음도 모던 걸들에게는 근대적인 감각을 자극했다. 그녀들은 아스팔트를 지켜주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는 모던 보이들을 만나고, 그 아스팔트 끝에 위치한 백화점 쇼윈도의 유리창을 거울 삼아 립스틱을 바르며 모던 보이들을 기다렸다.

 

1930년대 모던걸과 모던보이 패션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영화와 유성기였다. 이 문명의 이기 덕분에 서구의 유행은 도쿄를 거쳐 발 빠르게 경성의 젊은 청춘들을 유혹했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패션을 따라 하고 유성기를 통해 유행가를 배웠다. 미국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 가죽 바지 덕분에 조선 모던 보이들은 세계 패션보다 빨리 나팔 바지를 입기도 했다. 영화는 라이프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것이 서구식 결혼 문화다.


지나가는 목사를 끌어다가 전광석화 같은 결혼식을 올리는 서구 결혼 문화를 영화론 모던 보이들은 이를 흉내 내어 지나가는 여인을 따라가 결혼 신청을 해 결국 정신 병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서구 문화 따라 하기는 계속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패션의 속성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의 럭셔리 만능주의나 물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3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남겨 놓은 자본주의적 흔적이 아닐까 합니다. 주체적인 패션이 아닌 서구의 패션을 따라 하는 사대주의 패션의 뿌리는 지금도 고질적인 명품 병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fashionn@fashion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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