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토크 | 디자이너 이도이 Doii | 2013-12-10 |
2013 코리아패션대산 산업통산자원부장관 표창
디자이너 이도이, 제6회 코리아패션대상 산업통상자원부장관 표창
지난 11일 열린 제6회 코리아패션대상” 시상식에서 디자이너 이도이가 산업통상자원부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디자이너 이도이는 세계 3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스쿨 출신으로 존 갈리아노, 겐조 등 명품 하우스에서 경력을 쌓은 후 2005년 파리에서 '도이 파리스(Doii paris)'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후 ‘차세대 안나 수이’로 불릴 정도로 비딩과 매듭 장식 등 독특한 수작업으로 유명하다. 2006년 10월 파리 패션 위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2008년부터는 서울 컬렉션에 참가하며 그 동안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뉴욕 및 캐나다, 홍콩, 싱가포르 등 초대 패션 쇼 및 작품을 전시했다. 이후 현재까지 중동, 유럽 쪽에서 꾸준한 인지도를 얻고 있으며 중국 및 일본에서도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젊은 디자이너 이도이의 행보가 거침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 패션계에 나타나 언론의 주목을 받더니 이젠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확보했다. 패션 디자이너 치고는 다소 튀는 외모와 스타일로 그녀는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 내는 패셔니스타이자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에게 패션은 어릴 적 읽은 동화다”
그녀의 원피스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그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원피스에 대한 남보를 집착증을 보였던 그녀는 원피스를 한번 입으면 절대 벗지 않아 어른들을 힘들게 했다. 어린 시절 결핍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소유욕이 아니었을까 싶다.
“부모님이 너무 일찍 결혼해 학생 부부였던 덕분에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혼자 놀기의 진수를 스스로 깨우쳤죠. 동화책을 읽고 공주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은 기본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화책 읽기는 인형놀이로 발전 되었죠.” 인형 놀이는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되었다. 돌이켜보면 독서와 인형 놀이는 그녀의 패션 인생의 전령사였던 셈이다.
부모는 의대를 다니는 가난한 학생 부부로 신랑은 23살 아내는 21살이었다. 젊은 아빠는 딸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한글을 가르쳐 준 것이다.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이 많은 딸이 책과 친해지도록 하기위한 아빠의 배려였을까? 어쨌든 그녀는 3살 때부터 책과 친구가 되었다. 지금도 밥은 안 먹어도 매일 책은 꼭 읽어야 한다. 책을 안 읽으면 뭔가 허전하다. 그녀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 이상이다. 혹자는 종이 시대는 한물갔다고 말하지만 종이가 주는 편안한 촉감과 커피향 만큼이나 깊은 종이 냄새는 일상에 찌든 그녀의 육체를 무장 해제시키고, 창의적인 두뇌 플레이에 마모된 영혼을 목욕시킨다.
1994년, 그녀는 계명대 서양학과를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서양화과를 들어갔지만 무엇인가 2% 부족했다. 그것은 남모를 갈증이었다, 그것이 패션인지는 무엇인지는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도 몰랐다. 단지 뭔가 새로운 환경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런던 유학. 1997년 영국 블레이크 칼리지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처음에는 어학 연수를 받기 위해서 런던에
갔었지만 포트폴리오 만드는 수업을 들으면서 패션 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패션은 그녀의 가슴에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센트럴세인트마틴예술대학에 시험을 봤다. 경쟁률이 140:1이었다. 합격을
꿈꾸기엔 너무 높은 경쟁률.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인 셈이다. 어쩌면 파인 아트를 전공했던 백지같은 창의력에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커머셜 가능성이 후한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98년 센트럴세인트마틴에술대학에 입학해 패션디자인과 니트웨어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 패션쇼에서 ‘The best 10 Graduates Of Central St. Martins 2002’에 선정됐다. 이제 정말 자신이 진짜하고 싶은 일이 패션이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도 패션이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런던의 교육 시스템은 저와 잘 맞았어요. 어떻게 만드는가 보다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무엇을 만들까 보다 왜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업 방식은 늘 새로운 무엇인가를 요구했죠.”
학생들의 학점을 게시판에 공개하고 졸업생 숫자를 관리할 정도로 엄격한 학사관리는 그녀의 도전 욕구에 기름을 부었다. 어차피 늦게 시작한 패션이지만 최고가 되고 싶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패션 영재들과의 무한 경쟁을 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어요.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거나 남들과 비교해서 제 작업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땐 참을
수 없이 힘들었죠. 어떨 때는 저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면서 나름 방황도 했었구요.”
그런 그녀의 방황을 잡아 준 것이 바로 선생님들이었다. 자시만의 끼를 찾아 노력하는,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학생을 교수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잘한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못한 작업에 대해서는 진솔한 꾸지람도 병행되었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어요. 칭찬을 들으면 그동안의 피로가 한방에 풀리면서 무엇인가 보상받은 느낌이 들더군요. 적어도 런던에서 공부하며 들은 교수님의 칭찬은 저에게 한잔의 카페라떼처럼 달콤하고 따뜻했죠.”
그녀에게 런던은 실험실과 같은 존재였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았다. 특히 아카데미즘과 커머셜리즘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은 그녀의 숨어있는 재능을 끄집어내기에 최고였다. 특히 학교 근처의 다양한 서점은 그녀에게 ‘발상의 보고’였다. 세계 각국의 패션 & 예술 출판물이 모여 있는 책방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던 소녀처럼 패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상상은 다음날 과제로 제출되었음은 물론이다.
명품하우스에서 패션과 연애하다
센트럴세인트마틴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녀가 첫발을 디딘 직장은 학교 선배인 존 갈리아노였다. 그 곳에서 1년간 일하면서 갈리아노만의 창의적인 에너지와 패션 아우라를 배웠다. 이어 겐조에서 3년간 일했다.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토니오 마라스는 그녀에게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이미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센트럴세인트마틴에서 만난 전 세계에서 온 패션 영재들로 이루어진 든든한 인프라 덕분이었다.
4년간 명품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진정한 럭셔리 지성’에 대한 화두에 봉착한다. 더불어 하이엔드 패션의 방향성도 함께 고민했다. 결론은 스스로 부딪혀 가면서 하나씩 깨우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럽의 다른 젊은 디자이너처럼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도이파리스’를 론칭했다.
“제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럼 잘 팔릴 것 같았어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충만했어요. 유행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어요. 너무 특이해서 옷장에 잘 넣어 두었다가 특별한 날에 입고 싶은 옷이 제가 만들고 싶은 옷이에요. 즉 보헤미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보보스족이 제가 추구하는 고객이죠.”
그 패션 철학은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최근에는 프린트에서 벗어나 패턴에 좀 더 집중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 마음껏 그림을 그렸으니까 이제는 그 그림을 안정적으로 표현할 이젤과 도화지를 만들어야 도이 패션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드레스와 코트를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소비자 반응이 좋아요.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할 수 있고, 스스로의 인생을 걸 만한 일에 집중하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온다는 교훈을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느끼게 되었어요. 자신만의 패션세계를 직접 리드하고 싶은 젊은 친구들이 있다면 과감히 패션에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녀는 후배들에게 도전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신대륙을 가리키며 보다 멀리보고 넓게 보라는 충고한다.
파리에서 둥지 틀고, 서울에서 날다
파리에서 매장을 낸 관계로 편의상 파리 출신으로 분류되는 그녀는 국내에 소개된 지 1년 만에 서울컬렉션을 통해 바이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블랙 & 화이트 등 모노톤 일색인 여성 컬렉션에서 반짝임과 다채로운 프린트로 여성스러움을 발산하는 ‘도이파리스’의 매력은 서울컬렉션의 군계일학이었다.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도하지 못했던, 아니 이전에 시도를 했지만 시기상조와 완성도 미달도 사라져간 섹시 페미니니티 컨셉을 고급스럽게 살려낸 그녀의 도전에 대한민국 패션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한국패션문화쇼룸에 참여해 신예 디자이너로 당당히 선배 디자이너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도 해외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한동안 심사기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시샘어린 눈총과 루머에 시달렸지만 이름처럼 당당하고 도도했다.
서울컬렉션 이후 뜨거운(?) 관심 덕분에 그녀는 신사동 가로수길에 쇼룸 겸 매장을, 대구에 매장을 열었다. 궁극적으로 한국에 근간을 두고 본격적인 세계화 전략을 펴기 위해서다. 생산은 국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인은 파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녀는 국내에서 안정적인 발판을 만들어 국내와 해외의 시너지를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다. 그녀가 한국으로 턴 한 것은 단순하다. 바로 빠르고 품질 좋은 생산력 때문이다. 그녀는 세계에서 한국처럼 패션 기반이 잘 다져진 곳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신사동 가로수길 아뜰리에에서 샘플을 손으로 일일이
만드는데, 파리 오트 쿠튀르에서 일하는 친구가 국내에서 만들어진 샘플을 보고 최고의 퀄리티라고 칭찬하더군요. 가격은
파리에서 제작한 것에 비해 50% 이상 저렴하고요. 우리
재봉 실력도 세계적으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봐요.”
다만 젊은 디자이너가 파리에 기반을 두고 컬렉션을 진행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수량이 작은 젊은 디자이너에게 생산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단을 주문했을 때 샘플 받으려면 3주를, 생산이 완성되는 것은 3개월을 지체해야 하죠. 또 법인을 운영해도 세금이나 보험 등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요.”라며 고민하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남다른 고충을 토로한다.
그녀가 해외 바이어에게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녀만의 독특한 패션 때문이다. 매 시즌 컬렉션마다 등장하는 반짝이는 ‘도이파리스’의 아이덴티티는 확실히 독보적이다. 반짝이의 느낌은 소재나 방법에 따라 비딩, 자수, 혹은 보석 패치로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선물한다. 반짝거리지만 입었을 때 불편하거나 너무 에스닉한 것은 아니다. 반짝이면서도 웨어러블한 것, 그것이 그녀만의 차별화 포인트이다.
“내 옷에서 ‘반짝이’는 장식적인 요소 그 이상이에요. 그것은 스토리텔링에 따라 달라지는 오리지널리티거든요. 마치 소설 복선과 같은 존재죠.”
여행을 통해 패션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녀는 방학이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여행을 떠난다. 이국적인 거리 풍경과 시장 냄새, 사람들에서 늘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여행은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한 판타지의 직접적인 확인 과정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동화 속 아름다움은 지루한 일상을 날려주는 청량음료와 같은 존재였다면 어른이 된 지금, 여행은 패션 해방구다. 여행을 통해 얻은 엽서와 책,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림책에서 영감을 받은 프린트는 바로 디지털 프린트를 통해 패션으로 부활한다.
매 시즌 패션쇼를 즐기는 그녀는 모델 선정 기준도 독특하다. 키는 177이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모델 같아야 한다. 요즘 뜨고 있는 강소영이나 백지원 같은 모델이라고. 감이 안 온다고 하자 자신의 몸매에서 키와 팔다리를 늘린 것을 상상하면 된단다. 농담치고는 쌔다. 하지만 그 자만심은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 너무 인형 같은 마스크라 인간적인 느낌(?)은 덜하지만 키만 크면 모델을 해도 좋은 마스크와 몸매다. 인정!
패션쇼 준비는 스토리부터 만든다. 자신이 읽은 책과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패션쇼를 만든다. 디자이너 빅터 & 롤프나 화가 피카소를 좋아하는 그녀는 그림을
통해 패션과의 소통을 꿈꾼다. 그럼 2011년 가을/겨울 컬렉션의 스토리를 과연 무엇일까? 러시아 발레리나라고 한다. 20세기 초 러시아 발레단의 일러스트와 빛바랜 발레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패션을 선보인다. 노스탈직 느낌과 드라마틱한 커팅을 통해 이도이식 스트리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의 소비자는 40대가 많다. 커리어가 강하고 특별한 옷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디자인 영감은 영한 스트리트에서 가져오지만 옷의 완성도와 에스프리는 럭셔리와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 여성 소비자들은 스스로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는 소비자들이죠. 그래서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는 데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죠. 너무 단점을 커버하는 데 집중하다보니 실험정신이 실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빈티지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을 한국 패션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현재 미국, 이태리, 쿠웨이트, 일본, 홍콩,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에 옷을 판매한다. 컬렉션을 통해 바이어들이 수주한다. 국내 백화점 영업과 달리 수주한
물량을 약속된 날짜에 배에 실어 보내면 된다. 주문 받을 때 선금을 받고 선적할 때 나머지 잔금을 받는다. 우송료도 바이어가 부담한다. 재고 부담이 없는 환상적인 패션비즈니스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탁 판매 위주의 국내 백화점에 안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다. 아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국내 유통에도 조금씩 도전해 볼 생각이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다. 세계 시장에서 먼저 인지도와 명성을 쌓아 해외 수입 브랜드와 당당하게 겨루고 싶다. 그것이 바로 패션의 세계화이자 패션의 유통화라고 말한다.
결국 지속 가능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부든 스폰서든 꾸준히 디자이너를 밀어주어야 하는데 세 시즌 지원하고 무엇인가 성과를 바라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는 유통 뿐 아니라 정부의 젊은 디자이너 육성방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그녀는 이제 멀리 내다본다. “21세기형 디자이너 마인드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세계는 하나라는 생각이 중요하죠. 그러면 세계 패션 시장이 하나의 시장으로 보입니다. 이제 세계적인 패션 유통과 패션 마케팅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해외로 눈을 돌려야 길이 비로소 보입니다."
최근 중국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그녀는 늘 비즈니스적인 감각으로 움직인다. 처음에 맨땅에 헤딩하는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다면 몇년간의 경험을 통해 노하우도 쌓였다. 이번에 상을 받은 것은 K 패션으로 성공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인다는 그녀는 2008년 국내에 처음 들어와 서울 컬렉션을 할 때와 비교하면 인지도도 많이 오르고 비즈니스 마인드도 많이 늘었다.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도전을 즐기는 그녀에게 여전히 패션은 꿈을 꾸게 해주는 동화책이다.
패션엔 유재부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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