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2019-10-19 |
[리뷰] K-패션의 희망 햇살, 2020 봄/여름 뮌 컬렉션
디자이너 한현민은 2020 봄/여름 뮌 컬렉션을 통해 고 이영희 디자이너가 지난 20세기 파리에서 휘날렸던 '바람의 옷'을 21세기 버전의 세련되고 모던한 K-패션으로 변주했다.
국내에서 서울패션위크를 취재하거나 해외 출장을 갔을 때, 해외 바이어와 기자들로부터 자주 듣게되는 질문이 바로 "K-패션이 무엇인가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당황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필자는 다시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묻는다. "K-패션이 뭐죠?"
이 질문에 디자이너들 역시 대답을 못하고 난감해 하다가 내놓은 대답이 "한국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하면 그게 K-패션 아닌가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K-패션도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팩트가 있어야 한다. 즉 K-팝이나 K-드라마, K-푸드처럼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 18일 늦은 밤, 동대문 DDP에서 열린 한현민 디자이너의 2020 봄/여름 뮌 컬렉션은 K-패션의 정체성에 대한 한 줄기 햇살같은 존재였다. 처음 한복이 90년대에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를 질주할 때 들었던 '바람의 옷'이라는 느낌은 이번 뮌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신 파리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수줍었던 '한복'이라는 코스튬은 이제 런던에서 글로벌해진 'K-패션'이라는 트렌드로 성장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9월 말 런던패션위크에서 뮌의 패션쇼가 미디어와 바이어들의 주목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서울패션위크의 쇼 장은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만원이었다. 요즘 패션쇼가 단촐하게 진행되는 것에 비하면 다소 의외였다. 어쨌든 그 덕분에 패션쇼는 예정시간인 8시를 훨씬 넘어서 시작되었다. 쇼 지연으로 관객들은 짜증이 날법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피날레 퍼레이드가 진행되었고 디자이너가 피날레 인사를 하기 위해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는 젊잖은(?) 한국 런웨이 무대에서 보기 드문 현상으로, 아마도 K-패션의 단초를 보여준 크리에이터 한현민에 대한 고마움과 격려의 박수가 아니었을까.
매 시즌 한현민 디자이너는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패턴의 조합방식, 봉제의 순서와 방법, 소재와 개념 등 낯선 방식으로 새로운 룩을 제안하며 해체주의와 테일러드가 만나는 그만의 정체성을 드러냈고, 이번 시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한국복식에서 그 모티브를 얻었다.
디자이너는 전형적인 동서양의 조합과 포멀과 캐주얼의 만남을 통해 전혀 새로운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뮌의 세계에서 한국복식이 동양을 대표하는 테마가 되었을 때 그것은 실루엣보다는 디테일과 소재에서 더 빛이 났다.
디자이너는 한국의 전통적인 옷감에 속이 비치는 튤과 나일론을 믹스했으며, 대조를 위해 오버사이즈의 편안한 블레이저와 드로스트링 트라우저, 그리고 보머 재킷과 핀스트라이프 쇼츠를 각각 매치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한국적인 소재와 서양의 사토리얼 스타일을 능숙하게 혼합하는 디자이너의 능력이었다. 실크와 크레이프의 와이드-레그 팬츠와 흘러내리는 코트가 대표적이었으며 한복에서 영감을 받은 실루엣, 개념, 동정, 매듭, 복주머니 등의 디테일이 의상에 반영되었다.
여기에 한복의 전통 소재인 시스루 오간자, 꽃무늬 자카드 실크를 활용해 서양 테일러드와 아웃도어 의상을 만들거나 반대로 스포츠 소재인 초경량 나일론과 방수원단을 사용해 한복 무드의 착장을 만드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고인이 된 이영희 디자이너는 파리패션위크에서 '바람의 옷'으로 칭송을 받았지만 국내 S 호텔에서 롱 스커트가 거추장스럽다고 푸대접?)을 받았던 한복이 디자이너 한현민에 의해 다시 업그레이된 2.0 버전을 선보인 셈이다. 기모노에 이어 패션 사전에 올라간 한복의 진면목이 젊은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나왔기에 반만년 한국 복식을 기저로 한 K-패션의 미래는 매우 밝다.
특히 한국적인 소재와 서양 복식의 베이직으로 통하는 트렌치 코트의 다양한 응용은 단연 압권이었다. 드롭 웨이스트와 라펠의 옥양목으로 재창조하거나 파이핑이 있는 곡선적인 주머니 덮개로 마무리했다. 여기에 환상적으로 흐르는 팬츠는 대조적인 핀 스트라이프와 초크 스트라이프로 선보였다.
게다가 그는 많은 첨단 스포츠웨어를 응용했다. 마이크로-파이버의 헌팅 웨이스트코트부터 골드 자카드의 윈드브레이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패브릭 꽃으로 가득찬 거대한 트렌스퍼런트 다운 퍼퍼까지 다양했다.
한국 복식의 디테일을 서양복에 녹여내기 위해 디자이너는 소매자락 앞섶은 주름을 잡거나, 조이거나, 잡아당겼지만 반면에 와이드-레그 트라우저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했다.
다른 옷에서는 포켓이 퍼플로 장식되었고 일부 모델들은 전통적인 플로랄 패턴의 새틴으로 만든 작은 드로스트링 백팩을 매고 있었다. 마지막 두가지 룩에서 디자이너는 프린지 탑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기술을 사용해 로프와 수술용 튜브로 매듭을 지었다.
디자이너가 선보인 액세서리 역시 풍부한 열정을 추가했다. 튤 양말과 함께 신은 실버 주얼리로 마무리한 샌들부터 잉카인 족장부터 미국 서부영화에 나오는 코만치족 전사를 연상시키는 멋진 모자 시리즈까지 멋진 쇼를 위한 감초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에게 바라는 희망사항이 있다면 한국복식의 레퍼런스를 조선을 넘어 여장부 소서노가 말 달리던 고구려,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 대조영의 발해로 확장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에 보란 듯이 말이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앙드레 김이 완성하지 못한 판타지의 끝장 '통일신라의 꿈'도 한현민 디자이너가 완성시켜주기를 기대해 본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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