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 2018-10-30 |
신언서판(身言書判)적인 관점에서 본 패션 디자이너의 자격
요즘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배출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디자이너라면 확실한 스타일과 정체성 등 갖추어야 할 자격 역시 중요하다. 온고지신이라고 했다. 옛 선조들의 신언서판적인 개념을 통해 디자이너의 조건을 다뤄보고자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삶 속에는 ‘꿈, 깡, 끼, 끈, 꾀, 꼴, 끝’이란 ‘쌍기역(ㄲ)으로 된 7가지 말’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청춘은 꿈을 꾸고 도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위의 7가지 요소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서바이벌 시대의 승자만을 위한 덕목이다. 성공은 있지만 배려는 없고, 금전은 있지만 삶의 여유가 없다. 물론 실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근본적인 인성에 관한 접근이 필요하다. 취재를 위해 젊은 디자이너들은 만나면서 요즘 ‘신언서판’이라는 단어가 자주 머리를 스친다.
옛날 고사성어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명언이 있다. 중국 당나라 시절 관리를 채용할 때 사용한 인재평가의 기준으로 체모(體貌)·언변(言辯)·필적(筆跡)·문리(文理)의 네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고급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이나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의 표준 역시 신언서판이었다.
신언서판의 개념은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고 있는 젊은 디지털 세대 디자이너들에게도 필요한 아날로그적인 처세술이 아닐까 한다. 신언서판적인 관점에서 패션 디자이너의 자격론을 살펴본다.
먼저 ‘신(身)’이란 풍채와 용모를 뜻한다. 보통 상대방에 대한 인상은 만나자 마자 0.2초 만에 상대에 대한 평가를 끝낼 정도로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얼굴(顔)이 맨 먼저 변하며 그 중에서도 눈(目)이 변한다고 한다.
따라서 친구나 지인을 만날 때 얼굴이 전과 달리 많이 좋아졌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변화의 첫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때문에 첫인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옷차림 역시 중요하다.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신체발모 수지부모(身體髮毛 受之父母)’라는 옛말처럼 타고난 신체와 외모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단정한 용모와 밝게 웃는 얼굴은 상대방에게 행복 바이어스를 전파하는 대인 관계의 최대 덕목이다.
패션 디자이너는 옷차림을 제시하는 소위 ‘유행 전령사’다. 인간의 기본 생존 수단인 의식주 차원의 치부를 가리고 추위를 막는 원초적인 개념의 제2의 피부 옷(Clothes)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유행(Fashion)을 창조하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옷을 입는 행위는 그 자체가 실천적 자세다.
디자이너는 늘 패션을 앞서가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자신의 옷차림 자체는 살아있는 광고판이다.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답게 옷을 입어야 한다. 말로만 TPO가 아닌 스스로 그 원칙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유능한 셰프는 음식도 잘 먹고 다소 통통하다. 입이 짧은 마른 셰프가 만든 요리가 맛이 있을리 없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디자이너답다”라는 말은 들어야 한다.
자신도 옷을 잘 입지 못하면서 유행을 리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이너 빅토리아 베컴과 알렉사 청, 이사벨 마랑은 자신의 만든 옷을 직접 입고 다녀 스스로 광고 모델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디자이너의 올바른 옷차림은 단지 눈에 보이는 세련된 패션 센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타일 수준을 넘어 올바른 몸가짐 역시 중요하다. 가끔 젊은 디자이너 중에 갓 대학을 졸업한 인턴 시원들에 대한 다소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 겉으로 옷은 번지르르하게 잘 입지만 프로패셔널 디자이너로서의 몸가짐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현대 사회에서 패션 디자이너는 셀러브리티 대접을 받는 스타들이다. 스타란 공인의 다른 말이다. 외부로 드러나는 세련된 옷차림으로부터 예의범절을 지키는 올바른 리더십까지 ‘신(身)’은 현장에서 요구되는 패션 디자이너의 필요충분 덕목이 아닐까 한다.
두 번째는 ‘언(言)’이다. 이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인 언변을 의미한다. 물론 디자이너에게 정치가와 방송인 같은 화려한 언변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 톤이 단전에서 울려 나오는 진실한 목소리가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 준다.
그 어느 때보다 소비자와 소통이 중요해진 패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FMC)에서 자신에 대해, 자신의 옷에 대해, 자신의 패션 철학에 대해 소비자들과 진실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늘 고객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고 공손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인터뷰를 할 때도 자신감있는 말투와 전문가다운 유머가 중요하다.
적어도 자신이 만든 옷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다운 말투나 제스추어가 필요하다. 브랜드의 정체성에 대해 강조하고 매 시즌 변화하는 트렌드도 설명해야 한다.
그 대상은 단지 옷을 구매하는 일반적인 고객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소비자인 단골과 동료 디자이너들, 언론사 기자들 역시 중요한 대화의 파트너들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옷에 대해 멋있게 소개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변이 요구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진정성을 알 수 없다.
자신이 만든 작품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이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언변은 매스 미디어 사회를 살아가는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조건이다.
늘 고객과 소통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대화를 통해 공감하며 옷을 만들어야 소위 ‘국민 디자이너’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방송 연예 프로그램에 나가 왜곡된 디자이너 모습이 아닌 K-패션을 이끄는 프로패셔널 디자이너의 매력을 전파하는 홍보 대사들이 되길 바란다. 이미 모델들은 그 벽을 깨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 디자이너들 차례다.
세 번째 서(書)는 글씨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개인의 필적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요즘은 붓 대신 컴퓨터 자판이나 모바일 자판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그 의미는 글씨체보다 글의 내용으로 확장하는 것이 맞을 듯 싶다.
소위 소셜 미디어 시대다. 대중들은 짧은 글과 이미지로 소통한다. 패션계도 예외도 아니다. 어쩌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한 글로벌 디자이너와 팔로워들의 관계는 팬의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인플로언서 마켓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 세계의 유명 디자이너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고객들과 24시간 7일 쉼없이 소통한다. 심지어 리한나 혹은 킴 카다시안, 켄달 & 카일리 제너 자매 같이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셀러브리티 디자이너들도 막강한 소셜 미디어 팔로워들을 거느리고 패션과 뷰티 산업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이제 전문적인 패션 디자이너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팔로워들과 소통하며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해야 한다. 디자이너에게 소셜 미디어는 공식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며 피드백 과정이다.
알렉산드로 미켈레와 같은 디자이너들은 팔로워들과 수시로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현장직구 형식의 패션쇼도 소셜 미디어가 있기에 가능하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브랜드에 대한 사실에 근거한 정직하고 정확한 글을 써야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소비자가 가치 소비를 할 수 있는 브랜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패션은 감각적인 이미지와 감성적인 짧은 글이 장점이다. 이를 위해 디자이너는 짧은 글을 감성적으로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프로모션은 홍보 담당자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마케팅 믹스에 젖어있는 옛날 생각이다.
패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FMC)의 핵심은 일관성과 상호보완성이다. 매 시즌 한 가지 메시지를 정해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부서가 서로 보완성을 유지하며 프로모션을 해야 성공적인 시즌을 이끌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감각적인 글과 그 안에 들어있는 진정성이다.
마지막은 ‘판(判)’으로 판단력을 의미한다. 패션은 예술적인 속성과 비즈니스적인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인 판단력은 매우 중요하다.
21세기의 패션 비즈니스는 매 시즌 리스크 요소와 변수가 많기 때문에 매 번 변화와 위기에 대처하는 관리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특히 젊은 디자이너들은 변수가 많기 때문에 패션 비즈니스와 관련된 판단을 할 때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물론 이는 경험과 선배 디자이너들의 조언이 쌓여야 비로서 형성되는 패션 경영의 기본이다.
패션 디자이너는 ‘최신 유행의 전령사’이다. 최소한 1년 전부터 준비해 6개월 전에 패션쇼를 미리 선보이거나 전 세계 바잉 전시회에 참가해 미래 제품을 고객들보다 먼저 바이어들에게 선보인다.
아직 제품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바잉 현장에서는 즉각적인 판단이나 센스가 필요하다. 즉 특수하고 돌발적인 상황이 많은 유통 시장에서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매사에 비즈니스적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시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잘못된 판단은 회사에 금전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고 더 나아가 실패의 원인이 된다. 때문에 디자인은 뜨거운 가슴으로 꿈을 꾸되 비즈니스는 차가운 머리로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몸(얼굴)이 변화면 말이 바뀌고 글씨체가 변하며 결국 사리판단이 합리적으로 변한다고 했다. 신언서판을 옛날 구닥다리 고사성어로만 보지 말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디자이너들의 아날로그적 세계관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 시즌 패션쇼를 하는 디자이너들은 사물이나 경험에서 영감을 얻고 레퍼런스를 토대로 컨셉을 정하고 이를 옷으로 변주한다. 패션은 유행의 흐름이자 동시에 시대의 변화를 읽은 수 있는 역사다. 기록은 디지털적이지만 그 역사를 기록하는 원천은 ‘신언서판’적인 아날로그적인 관념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칼 라거펠트는 가장 신언서판적인 디자이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구나 첫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신만의 블랙 시그너처 스타일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이슈에 대해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늘 소신있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신의 브랜드를 포함 많은 브랜드의 패션쇼는 물론 잡지에 칼럼을 쓰고 브랜드 광고 사진도 직접 찍는다.
최근에는 조각가로도 변신한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하지만 신언서판을 두루 갖춘 원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게 인생은 예술보다 길게 느껴진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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