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7-02-12

혼돈의 뉴욕 패션위크, 위기에 봉착한 이유

뉴욕 패션위크가 도날드 트럼프의 미국중심주의와 현장직구 패션쇼로 혼란이 가중되며 위기에 봉착했다. 상당수 디자이너들이 컬렉션을 포기하거나 유명 스타 디자이너들은 뉴욕을 떠나고 있다. 잘나가던 뉴욕 패션위크의 역사와 위기상황에 봉착한 이유, 아울러 서울패션위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본다.


 


빅 4 글로벌 패션 위크 중에서 런던, 파리, 밀라노에 비해 가장 늦게 출발한 뉴욕 패션위크였지만 현재 뉴욕 패션위크는 글로벌 패션 위크 시즌 오프닝을 장식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뉴욕패션위크의 오늘날 영광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뉴욕 패션위크는 런던, 밀라노, 파리에 이어 제일 마지막에 열렸다. '패션 삼국지'에 빠진 바이어들의 충동(?)적인 바잉으로 정작 뉴욕 패션위크가 시작될 즈음 지갑은 텅텅 비어 바잉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당시 뉴욕 패션은 바이어나 프레스의 관심 저편에 있었다. 단지 젊은 디자이너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 가능성만 안정 받은 상태였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해 파리 오뜨 꾸띄르 시장이 쇠퇴하면서, 도나 카란과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과 같은 미국 빅 3 브랜드가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프레스와 바이어들에게 뉴욕의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파리나 밀라노의 유명 럭셔리 하우스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뉴욕 패션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 바로 마크 제이콥스나 톰 포드와 같은 젊은 뉴요커 디자이너였다. 이들이 유럽 럭셔리 하우스의 대표격인 루이 비통과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럭셔리 하우스의 헤리티지와 미국식 모더니즘의 만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미국의 3인방 선배들이 시작한 미니멀리즘을 뉴욕 패션의 색깔로 변주시켰다.



 

따라서 2000년대 들어 세계 패션계가 뉴욕 패션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뉴욕 패션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뉴욕의 젊은 다자이너에 대한 군침 삼키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존 갈리아노나 알렉산더 맥퀸 같은 런더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주목하던 럭셔리 하우스들의 스카우터들이 뉴요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뉴욕 패션도 비상할 수 있는 도약의 기회가 온 셈이다.

 

이 때 절호의 기회를 성공으로 연결시킨 장본인이 바로 당시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 사무국장이었던 펄 멜리스였다. 19432차 세계대전 중에 램버트에 의해 '프레스 위크'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뉴욕의 패션쇼 문화를 50년 뒤인 1994년 CFDA에 의해 '뉴욕 패션위크'로 다시 부활했다.


당시에는 런던, 밀라노, 파리에 이어 4번째로 뉴욕에서 패션쇼가 열렸다. 하지만 마지막 스케줄 일정 때문에 뉴욕 패션은 파리 패션을 따라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당시 펀 멜리스는 "뉴욕 컬렉션을 제일 먼저 보고 싶다"는 미국판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조언을 받아들여 파리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헬무트 랭을 뉴욕 패션 위크에 영입해 빅 4 패션 위크 일정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빅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당시 미국 디자이너 중 일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반대 의사를 표명한 디자이너도 많았다. 결국 조화와 설득에 능한 펀 멜리스는 헬무트 랭을 중심으로 패션위크 중 가장 처음 열리는 뉴욕패션위크에 참가하는 디자이너와 기존 일정대로   4번째로 열리는 뉴욕 패션위크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로 이원화시켜 과도기적인 뉴욕 패션위크 캘린더를 발표했다.


이원화시켜 진행한 뉴욕패션위크는 처음 열리는 뉴욕패션위크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의 바이어 주문이 급등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결국 CFDA 디자이너 전원이 일정을 앞당겨 뉴욕 패션위크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뉴욕 패션위크의 성공에는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의 공로도 한몫했다. 뉴욕을 자신의 목숨만큼 사랑했던 줄리아니 시장은 처음 뉴욕 시장에 취임할 때만 해도 현재의 뉴욕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깨진 유리창'이라 불리며 연간 60만건 이상의 범죄가 발생했던 뉴욕은 지하철에서 쥐들이 뛰어 다니고 밤늦은 시간에는 강도들 때문에 관광객들이 거리를 못 다닐 정도였다.

 


결국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뉴욕을 패션 캐피털로 만드는 관광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먼저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고 경범죄를 철저히 단속하고 기존 경찰력에 더해 상인들의 자원을 받은 사설 경비원들을 대폭 늘렸다.


뉴욕 소호 거리를 점령하고 있던 부랑아들을 허드슨 강가로 쫓아내고 자신과 같은 이탈리아계 부동산업자 출신인 LVMH 그룹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손잡고 유럽의 럭셔리 하우스들의 빌딩을 뉴욕 소호로 유치하면서 새로운 쇼핑 도시 뉴욕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소호는 명품 거리가 되었고 그 대안으로 노호라는 새로운 쇼핑 타운이 형성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뉴욕시는 앞장서서 뉴욕 패션 위크를 홍보하고 관광객들을 위해 뉴밀레니엄인 2000년 뉴욕 거리에서 갈라 패션쇼를 선보여 패션 관광도시 뉴욕의 새출발을 자축했다. 디자이너가 원하면 도로를 막고 패션쇼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뉴욕의 백화점들은 뉴욕 패션위크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건물에 내걸었다. 줄리아니 시장은 뉴욕 패션위크 오프닝 전날 모델, 디자이너들과 함께 연단에 함께 서서 뉴욕 패션위크의 공식 오프닝을 선언하며 뉴욕시 차원의 행사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여기에 뉴욕에 현지 법인을 가지고 세금을 내는 디자이너라면 다른 나라의 디자이너도 차별 없이 대환영했다. 결국 세계 각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기회의 땅 뉴욕으로 향했고, 나르시스 로드리게즈, 알렉산더 왕, 제이슨 우, 프로발 그룽과 같은 외국계 디자이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뉴욕의 열린 마인드 덕분이었다. 물론 이들 젊은 디자이너들의 옷을 즐겨 입었던 전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뉴욕 패션위크 행사를 개최하는 대행사 IMG의 공로 역시 인정해야한다. 뉴욕 패션위크의 남다른 특징 중 하나는 대대적 스폰서 시스템이다. IMG는 뉴욕시, CFDA와 손잡고 마케팅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뉴욕 패션위크의 공식 명칭인 뉴욕 패션위크 앞에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타이틀 스폰서를 붙인 것이 바로 IMG였다.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MG는 미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A)와 손잡고 2001년 뉴욕 패션위크를 사들이고 IMG 패션을 만들고 패션 이벤트 사업에 진출했다. 아울러 CFDA 펀 멜리스 사무국장을 IMG 부회장으로 영입하면서 부족한 패션쇼 노하우를 스포츠 마케팅 툴과 접목시켰다. 뉴욕 컬렉션이 상업적인 컬렉션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뉴욕에서 진행 중인 2017 가을/겨울 여성복 뉴욕 패션위크 일정을 보면 모르는 디자이너들이 너무 많다. 패션 에디터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재능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것이다. 패션계에 합류한 이유를 일깨워주는 유망한 신인 디자이너들을 발굴하는 것은 유명 디자이너의 쇼를 보는 것만큼이나 보람 있고 스릴 넘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 뉴욕 패션위크에서는 위험 신호가 포착되고 있다. 뉴욕 패션이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뉴욕 패션의 가장 매력적인 젊은 3인방 디자이너 후드 바이 에어, 로다테, 프로엔자 스콜러가 이번 시즌부터 뉴욕이 아닌 파리 패션위크에서 패션쇼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타미 힐피거, 레베카 민코프, 레이첼 코미, 톰 포드 등이 뉴욕을 떠나 로스엔젤리스에서 현장 직구 패션쇼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케이트 스페이드 뉴욕, 랄프 로렌, 미사 노누, 그리고 타쿤과 같은 브랜드들 역시 패션 위크 일정과 상관없는 현장직구(see-now, buy-now) 형태의 소비자 친화적인 패션쇼로 전환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1월에 링컨 센터에서 열리는 발레 프리젠테이션을 선택한 오프닝 세레모니와 같이 뉴욕 패션위크 스케줄을 모두 포기했다. 심지어 셀러브리티 출신 디자이너들도 서둘러 뉴욕을 떠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팝 가수 리한나는 자신의 펜티X푸마 컬렉션을 지난 시즌부터 뉴욕을 떠나 파리 패션위크에서 선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즈>가 지적한 것처럼, 디자이너들은 A급 스타들로 패션쇼장 앞좌석을 채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쇼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결국 뉴욕 패션위크 캘린더에는 소수의 유명 디자이너들만 남았다. 마크 제이콥스, 알투자라, 알렉산더 왕, 그리고  오스카 드 라렌타로 컴백한 몬세의 듀오 디자이너 페르난도 그라치아와 로라 킴 정도이다. 이번 패션위크에는 코치의 부활 신호탄을 쏘아올린 스튜어트 베버스와 캘빈 클라인 최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첫 데뷔 무대를 치룬 라프 시몬스 정도가 일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또 베트멍, 프로엔자 스콜러, 그리고 겐조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기존 패션 캘린더에 의존하는 것보다  1월과 7월에 열리는 꾸뛰르 위크에 참석하며 자신들의 장인정신이 깃든 상품을 선보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메이저 브랜드가 상당수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패션위크 스케줄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그들의 자리에는 젊은 무명 브랜드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CFDA는 쇼를 선보이고 싶지만,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나 자원이 부족한 젊은 디자이너들을 위한 솔루션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노력했기 때문이다.


패션쇼를 열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라인-업의 300개가 넘는 프리젠테이션이 발표되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비용을 감수하며 컬렉션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기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타미X지지 캡슐컬렉션 또는  #Wangfest 정도의 빅 이슈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빅 이슈 이벤트들은 확실히 재미는 있지만, 디자인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콘텐츠를 과장하는 위험요소도 뒤따른다.

    


그동안 뉴욕 패션위크는 예술적인 디자인과 상업적인 전략의 균형감있는 컬렉션으로 정착했다. 어떤 패션 위크든 성공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뉴욕은 미래 패션에서 어떤 역할을 원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인재들이 붐비는 곳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인플루언서들을 위한 가장 상업적이고, 소셜 미디어 기반의 행사가 될 것인지의 여부다. 이번 시즌은 일종의 파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최 측은 두 캠프가 다른 곳에서 관심과 집중을 받기 시작하기 전에, 미리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장직구 형태의 패션쇼를 처음 제안한 것은 CFDA였다. 이로 인한 혼란 역시 CFDA의 몫이다. S/SF/W 컬렉션이 혼재하는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 뉴욕 패션위크에 독이 될지 혹은 약이 될지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특히 새로운 미국 대통령 도날트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가 미국 패션의 글로벌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자칫 '양키고홈'이라는 전세계적인 반미 움직임이 미국 제품 불매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재 글로벌 패션 위크는 인터넷 생중계 덕분에 전 세계에서 실시간 시청할 수 있다. 또한 일부 브랜드는 패션쇼가 끝나고 바로 구매할 수 있는 '현장직구' 형태의 패션쇼를 선보인다. 지금은 어떻게 디자인하고, 어떻게 생산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팔것인가가 더 중요한 유통의 시대다. 물건이 넘쳐나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선택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비자들이 소통하는 지금, IT강국이라는 한국의 K-패션은 여전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플랫폼은 있지만 유통이 없으며, 유통은 있지만 바잉 시스템이 없다. 사입이 아닌 입점 형태의 유통 시스템은 K-패션 발전의 족쇄가 되었다.

 


지난 2000년 통합과 글로벌이라는 두 화두로 시작한 서울패션위크는 16년간 성공과 실패 요소가 공존했다. 신진 디자이너와 기성 디자이너의 분열과 바잉 유통 시스템 부재가 실패라면, 글로벌 바잉 쇼라는 성과 역시 얻었다.


특히 서울시의 신진 디자이너들을 위한 글로벌 육성 브랜드 사업인 ‘10 소울사업과 신진 디자이너를 위한 서울 창작스튜디오운영 등은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컨셉 코리아와 함께 K-패션의 세계화에 부응하며 젊은 디자이너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날고 기는 세계 4대 컬렉션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뛰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한류라는 호기가 왔음에도 이를 이용해 K 패션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글로벌 스텐다드 시스템과 노하우가 부족하다. 전략 없는 바잉 시스템이 그렇고, 전술 없는 컬렉션 시스템이나 모성애 없는 신진 디자이너 인큐베이팅도 문제다.


또한 현장직구 형태의 패션쇼 역시 디자이너들에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서울패션위크 차원의 대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냥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하기엔 세계 패션계 유통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러다 해외 직구에 국내 소비자들을 모두 빼앗길 판이다.

 


1989SFAA 컬렉션을 우리나라 정기적인 패션위크의 효시로 삼는다면, 25년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패션 위크지만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디자이너와 서울시, 그리고 서울디자인재단이라는 3박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해외 컬렉션 취재를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프레스와 디자이너에 비해, 서울시의 행보는 여전히 느리고 답답하다. 디자이너들의 바잉 쇼를 서울 시민을 위한 축제로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특히 23각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호흡을 맞추고 어깨동무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통이 중요하다. 소통 없는 일방 통행식 마이웨이를 걸었던 국가 원수의 말로를 지금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K-패션의 현재 상황은 서울시의 서울패션위크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는 패션코트가 따로 열리고 있다. 소위 '따로 국밥'이다. 입이 하나이고 귀가 두 개인 이유는 남의 이야기를 자신이 하는 말보다 두 배로 들으라는 얘기다. "독불장군에게 미래 없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언도 생각난다.


이제 서로에 대한 불신이나 서운함은 잠시 내려놓고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K-패션의 성공 요소를 제대로 꿰매어 굴러가도록 만드는 유통 플랫폼이 절실하다.


 

한국 패션에서는, 그것이 디자이너든 공무원이든 혹은 대행업체 직원이든 간에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부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와 서울시가 서울디자인재단이라는 공간 속에서 의기투합해 동대문을 한국의 소호 거리로 만드는 데 함을 합치면 어떨까 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K-패션은 무엇인가?" 라고 해외 프레스가 질문할 때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K-패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절실하다. 따라서 현재 혼란을 겪고 있는 뉴욕 패션이 내놓을 대안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지혜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글 유재부 기자

kjerry3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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