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 2016-08-19 |
알렉사 청의 릴렉스 무늬 바지와 화려한 ‘몸빼’의 무한 생명력
맥시멀리즘의 영향으로 화려한 무늬의 바지가 주목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알렉사 청의 스타일에서 영감 받은 화려한 무늬 바지를 우연히 보면서 문득 ‘몸빼’가 떠올랐다. 전통 한복을 현대에 맞게 개조해 대중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개량한복’으로 무시당하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 잔재인 ‘몸빼’는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민초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 열대 지역으로 휴가를 떠난 알렉사 청이 햇볕을 받아 빛나고 윤기 나는 스냅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다. 패셔니스타답게 그녀는 휴가 분위기에 걸 맞는 트렌디한 스타일을 과시했다. 손목에 매달려 있는 자연을 닮은 스트로백과 높은 콧마루에 자리 잡은 고양이 눈 선글라스와 함께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몸빼’와 유사한 화려함이 물씬 풍기는 세련된 무늬 바지였다. 애슬레저 룩과 다른 새로운 릴렉스 룩의 탄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선보인 화려한 프린트의 무늬 바지에서 영감 받은 다양한 아이템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국적인(?) 클래식한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일 바지라고 불리는 전통 노동복 ‘몸빼’였다. 물론 전시 상태에 돌아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한국 여성들이 입었던 복장이라 반일 감정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달갑지 않겠지만 패션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아주 중요한 아이템이 아닐까 한다.
먼저 역사적으로 보면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체제로 전환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내선일체론을 내세워 일본 국민들이 입는 몸빼와 국민복을 조선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강요했다. 덕분에 당시 패션은 카키색 군복과 비슷한 남성용 국민복과 활동복으로 불리는 ‘몸빼’가 전부였다. 국민복과 함께 여성복이 있었지만 강제 노역이 자주 있다 보니 치마저고리보다는 ‘몸빼’를 입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몸빼는 주로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이 주로 입었는데, 바지 형태로 가랑이 통은 활동하기에 알맞은 너비에 맞추고 허리나 부리에는 주름을 잡거나 고무줄을 넣었다. 여학생들은 여름에는 블라우스와 몸빼를 입고, 겨울에는 재킷과 몸빼를 입고 학교를 다녔지만 일부 학생들은 일제에 반발해 치마저고리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부녀자들은 ‘몸빼를 입는 다는 것은 가랑이가 터진 가래바지(속옷)만 입고 다니는 격’이라며 몸빼 입은 모습을 시부모에게 보여주기 싫어했다. 하지만 사회 통제와 군수품 조달을 목적으로 몸뻬 착용을 강요했기 때문에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일제는 1944년에 이르러 몸빼를 입지 않은 여성은 버스, 전차 등을 타거나 관공서, 극장에 가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처음엔 전통적인 관습 때문에 ‘몸빼’를 왜 바지라 부르며 반발이 심했지만 국가의 강압과 여성의 활동성 확보의 장점으로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해방이 된 후에도 조선의 부녀자들은 일을 할 때 자연스럽게 ‘몸빼’를 착용했다. 무의식적인 습관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여성들도 같은 시기의 외국 여성들처럼 활동복으로 치마보다 바지가 더 실용적이고 편안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패션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 여성들이 ‘몸빼’를 입는 다는 것은 대중적인 바지 착용의 시초로도 볼 수 있다. 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시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일종의 스타일 혁명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여성들이 바지 착용하게 된 계기도 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한몫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모든 여성들도 강제로 동원되어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몸빼’라는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전쟁터로 떠나자 집안 살림은 모두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고 집안일도 병행하다보니 기능적인 옷으로 진화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서히 ‘몸빼’인 바지가 치마보다 훨씬 실용적이라는 개념도 생겼을 것이다. 원래 몸빼('もんぺ)는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입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각지로 퍼졌다. 따라서 ‘몸빼’는 당시 일제에 의해 일본과 조선의 학생과 부녀자들에게 강제적으로 보급된 바지 착용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처럼 인도네시아에서도 '몸빼'가 아주 잘 팔리고 있다. 인도네시아 역시 일제 치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브랜드 ‘더센트로’의 예란지 디자이너가 한때 ‘몸빼’에서 영감을 받은 한국적 클래식으로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그 옛날 할머니 세대들에게는 강요된 일제의 노동복이었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색다른 실루엣과 패턴이었기에 당시 젊은 친구들이 반응이 좋았다. 패션은 인류가 서로 주고받는 ‘기브 & 테이크’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왕실의 뿌리는 백제라고도 하고, 가야난 백제의 복식 문화가 바다 건너 일본으로 전파된 것은 현재 남아있다. 우리 의 복식 역시 외세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당나라와 나당연합군을 만들었고 그 대가로 신라 왕족인 김춘추는 당나라의 복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면합의를 하고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였다. 즉 한중일 3국은 오래전부터 서로 의식주 문화를 교류한 셈이다. 다른 점이라면 삼국 시대는 왕족을 비롯한 귀족 들 간의 교류였고 ‘몸빼’는 백성들을 통한 교류였다.
각설하고, 글로벌 시대에 맞게 우리의 역사적 전통적 헤리티지를 찾아내 이를 현대화시키는 창조적인 발상이 우리 디자이너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글로컬 시대다. 제국주의 덕분에 국가간, 민족간 경계가 모호해졌다. 지금 브라질의 경우 원주민, 스페인과 포루투갈에서 건너간 유럽인, 노동력 때문에 끌려간 흑인, 이민 온 중동인과 일본인 등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있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교류와 융합은 글로컬 시대로 들어선 지구촌화의 본질이다. 이제 우리도 반만년의 역사에서 우리만의 헤리티지를 찾아내 모던 패션으로 변주하는 길만이 서양인들과 맞짱 뜰 수 있는 길이다.
이제 우리의 ‘몸빼’도 알렉사 청의 옷장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무늬 바지로 변신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적어도 일제 침탈을 당했던 아시아 국가에서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통할 듯 하다. 우리 전통 헤리지티지에는 ‘바람의 옷’ 패션 한복 뿐 아니라 ‘노동의 옷' 몸빼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강제침탈이었지만 35년이라는 세월동안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백성들은 그 상황에서도 외국의 의식주 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것을 지키며 단일 민족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 왔다. 그 백성들이 지켜온 유산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역사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동질성과 이질감의 문제다. 비록 일본에서 넘어왔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우리에게 맞는 융복합 현상을 일으킨 패션이 바로 기능성과 유머와 역사가 스며있는 ‘몸빼’가 아닐까 한다. 아래에 참고로 제시한 '몸빼' 스타일 바지는 현재 해외 시장에서 최저 2만 5천원부터 최고 91만원에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이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 <저작권자(c) 패션엔미디어, www.fashionn.com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