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2016-05-07 |
[5월의 패션아이콘] 메이퀸 오드리 햅번의 아이코닉 스타일
퀸의 계절, 5월에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패션 아이콘, 배우, 자애로운 인도주의자였다. 1999년, 그녀는 미국영화협회가 뽑은 역대 가장 훌륭한 여성 스타 3위에 올랐다. 첫 주연 데뷔작 영화 <로마의 휴일>부터 만인의 연인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배우뿐 아니라 패션 아이콘으로 세계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삶을 돌아보고 아울러 가장 ‘상징적인 스타일’ 순간들을 만나보자.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명문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었다. 하지만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가 이혼을 한다.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 아른헴 지역으로 휴양을 간다. 하지만 나치가 아른헴을 점령하면서 그녀는 전쟁의 지독한 공포와 굶주림의 10대를 겪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네덜란드 명문 귀족 출신이었지만 원뿌리는 폴란드인이었기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껴야 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런던 발레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녀는 발레에 소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발레리나가 되기엔 신장이 컸다. 당시 그녀의 키는 장신에 속하는 170cm였다. 어쩔 수 없이 발레리나의 꿈을 포기한 그녀는 런던에 온 후 틈틈이 해왔던 모델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모델 생활은 영화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영화계로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모델을 안했다면 스크린에서 멋진 스타일을 선보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드리 헵번은 1948년부터 유럽에서 단역으로 영화에 처음 출연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1951년 헨리 카스 감독의 <젊은 아내의 이야기>에서 단역이 아닌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역시 반응은 미미했다. 배우에게 3년이란 무명 시간은 짧은 기간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뉴욕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지지>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행운을 잡게 된다. 당시 <지지>를 관람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오드리 헵번에게 자신의 다음 작품 주연 오디션을 볼 것을 권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그레고리 팩과 함께 주연한 <로마의 휴일>이었다. 그녀가 연기한 앤 공주는 전 세계적으로 ‘오드리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만큼 인기와 명예를 안겨 주었다. 특히 주연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로마의 휴일>을 통해 그녀는 평생에 한번 받을까 말까하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완벽한 할리우드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녀가 보여준 패션 감각은 당시 수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패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모델 활동을 통해 얻은 뛰어난 패션 감각이 영화에서 큰 힘을 발휘한 셈이다.
<로마의 휴일>을 통해 완벽한 신데렐라로 등장한 그녀는 차기작에서 <카사블랑카>의 남자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와 <사브리나>에서 공연한다. <사브리나>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이런 성공에 힘입어 세계적인 여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사브리나>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만든 작품이라 불릴 만큼 이후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전쟁과 평화>, <하오의 연정>, <퍼니 페이스> 등을 통해 인기를 지속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대부분 청순하면서 순진한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그녀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 바로 <파계>였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단지 청순함과 순진함뿐만 아니라 기품 있는 배우임을 증명해 보여주었다. 기품 있는 수녀 역을 열연한 <파계>는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선물하지 못했지만, 제25회 뉴욕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제7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3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통해 멜로 영화의 절대 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그리고 1964년 작품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최초로 출연료 100만 달러 배우가 된다. 당시 100만 달러 출연료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후 1967년 <언제나 둘이서>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67년 이후부터 <로빈과 마리안>이 나오는 1976년까지 그녀는 배우로서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녀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은 1989년 특별 출연한 <영혼은 그대 곁에>였다.
한편 영화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영화처럼 순탄치는 못했다. 1954년 <전쟁과 평화>에서 함께 공연한 멜 펠러와 결혼하지만, 1968년에 이혼한다. 멜 펠러 사이에 아들 쇼를 두었다. 그리고 1970년 자신의 열혈한 팬인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다시 결혼하지만 1979년 다시 이혼한다. 안드레아 도티 사이에 역시 아들 루카를 두었다. 이후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와 동거했으나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열중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삶을 소외받는 이웃, 특히 지구촌에서 가장 극빈 국이 많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이런 삶은 많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88년 유니세프 홍보대사가 된 그녀는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서며 에티오피아, 수단 등과 같은 나라를 방문하여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살폈다. 1992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했을 때 대장암에 걸려 11월에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오래가지 못했고 다음 해 유명을 달리했다.
1993년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암투명 중에도 질병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세계 각지의 아이들을 찾아 다녔다. 눈이 퀭한 아이들을 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 봐도 사뭇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요정이 아니라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였지만 그녀가 출연한 그 어느 영화에서보다 아름다웠다. 1994년 그녀의 아들이 중심이 되어 ‘오드리 헵번 아동기금’을 설립하고 그 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한편 그녀의 삶에 있어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와의 평생 우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오드리 햅번과 지방시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영화 <사브리나>였다. 영화 <사브리나>를 찍기 전 자신의 주연 데뷔작 <로마의 휴일>을 찍은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의 마릴린 먼로가 주주하고 있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소속 영화사에서 제공하는 리무진을 거부하고 발레 슈즈 차림으로 걸어 다니거나 감독이 선물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서민적인 행보와 더불어 신체적으로도 당시 표준인 육감적인 섹시미와는 거리가 먼 가슴이 작은 키 큰 말라깽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델 출신답게 촬영을 쉬는 시간에 패션 잡지를 즐겨볼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마른 신체 조건을 풍성한 A-라인 실루엣으로 뉴룩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영화 <사브리나>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감독에게 주인공 사브리나 캐릭터가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공수한 실제 의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즉 영화사 소속 코스튬 디자이너가 아닌 실제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화 의상 제작을 맡겨야 한다고 제안했고, 결국 영화사로 부터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사용에 대한 허가를 받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이너를 만나기 위해 혼자 파리로 향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위베르 드 지방시였다. 당시 파리의 세느강 남쪽 지역의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보헤미안과도 같이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지방시는 기존의 딱딱한 ‘오뜨 쿠튀르’와는 다른 패션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53년 6월, 오드리 햅번이 지방시 매장을 방문했지만 직원 중 아무도 신인 배우였던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더욱이 영화 <로마의 휴일> 런던 프리미어가 한 달 뒤였고, 파리에서는 상영 일정도 잡히지 않은 상태라 그녀의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지방시를 사무실에서 만났지만 그는 처음 오드리 햅번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프랑스 제작 지부장으로 부터 '미스 햅번'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당시 유명 배우 '캐서린 햅번'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지방시는 오드리 햅번에게 정중하게 다음 컬렉션 작업 중이라 함께 영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했고, 지방시는 마지못해 그녀가 원하는 의상을 자신의 이번 컬렉션에서 선택하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곧바로 영화 <사브리나>의 세 가지 장면을 위한 의상들을 골랐다. 그 첫 번째 의상은 겉면이 진한 회색 플란넬 소재의 슈트였는데, 오드리 헵번이 그 의상을 입고 발레의 한 동작처럼 한 바퀴 돌자 지방시는 그 착장에 장갑을 더해 스타일을 완성했다. 다음으로 끈 없는 하얀 오간디 드레스를 입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지방시가 그녀를 위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몸에 딱 맞았다.
마지막으로 검정 피케 면 소재에 물결무늬를 넣은 칵테일 드레스 역시 그녀를 위해 만들어 진 듯 허리 라인은 잘록해 보였고 스커트는 가볍게 너울거렸다. 특히 쇄골이 보이게 넓게 커팅된 보트 넥을 참조한 네크라인은 나중에 ‘사브리나 데콜테’라고 알려지게 됐고, 피케 소재의 블랙 드레스와 함께 영화 개봉 후, 지방시의 베스트셀러 아이템이 되었다. 이렇게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영화 <사브리나> 이후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나머지 생애에서 언제나 지방시의 의상과 함께 했다. 지방시만이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이미지 메이커였을 뿐 아니라 1956년 이후부터는 오드리 헵번과의 영화 촬영 계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디자이너 지방시가 제작한 의상을 영화에서 입어야 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덕분에 둘은 6개의 히트 영화에 함께 참여했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레드카펫 행사에서도 늘 지방시 드레스를 입었다.
오드리 헵번에게 지방시의 의상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그의 의상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그냥 기분이 좋아져요” 라고 대답했고, 지방시 역시 “패션에 있어 그녀와 나 사이에는 절대적이고, 견고한 신뢰가 존재해요.” 라며 오드리 헵번을 좋아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오드리 헵번은 디자이너 지방시의 영원한 ‘패션 뮤즈’였다.
유명 패션 사진작가 노만 파킨슨(Norman Parkinson)이 촬영한 1955년의 오드리 햅번 모습으로, 지방시의 핑크 가운을 입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많았다고. 그녀의 절친에 따르면 그녀는 늘 “나는 피부도 좋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에 각이 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도 20세기 최고의 패션 영화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햅번. 지방시가 디자인한 이 작은 검은 드레스는 2006년 12월 5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약 판매 추정가의 7배인 8억5천만 원에 팔렸다. 영화에 나온 드레스로는 최고가였다. 수익금은 그녀의 아동 구호의 뜻을 살려 인도 빈간가 어린이들을 위한 ‘시티 오브 조이 에이드’ 자선단체에 기증되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팩과 함께 있는 청순한 이미지의 오드리 햅번의 단발 컷은 지금도 유행하는 대표적인 ‘햅번 스타일’이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브로드웨이에도 다시 진출해 연극 <운디네>에서의 열연으로 연극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드리 햅번은 1954년 영화 <로마의 휴일>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편 1954년 제26회 오스카 시상식 때 입은 에디스 헤드(Edith Head)의 이 드레스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의상과 비슷한 것으로 2011년 11월에 경매에 넘어갔다고 한다.
오드리 햅번은 20세기를 빛낸 유명 여배우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전적인 매력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패션 아이콘이기도 하다.
1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녀의 시그너처인 ‘헵번 룩’은 여전히 대중들과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위베르 드 지방시와 그녀의 평생 우정은 지금도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어 배우를 ‘패션 뮤즈’로 삼는 트렌드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영화 <퍼니 페이스> 세트장에서 오드리 햅번이 지방시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있다. 그녀는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그리고 토니상 등 미국 연예계의 그랜드슬램(EGOT)을 달성한 12명배우 중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다만 그래미상의 경우 음악적인 예술성이 아니라 ‘오드리 햅번의 동화’와 같은 오디오북으로 수상했다.
오드리 햅번은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와 오랫동안 남녀를 뛰어 넘는 우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수많은 지방시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었을 정도로 후원자이자 평생 고객이었다.
1969년 1월, 40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의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오드리 햅번. 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지만 13년 만에 이혼했다.
아이를 유난히 좋아했던 오드리 햅번은 바람둥이로 유명한 미국 배우이자 유부남인 멜 퍼러와 처음 결혼해 아이를 많이 가지려고 했지만 잦은 유산을 했고, 결국 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이혼했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 함께 출연한 멜 퍼러는 세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오드리 햅번과 네 번째 결혼을 했다.
1954년 오드리 햅번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 <사브리나>의 대부분의 의상을 위베르 드 지방시가 디자인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들의 평생 동반자로서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그녀의 시그너처가 된 캣-아이 선글라스를 쓴 오드리 햅번. 청순한 이미지와 달리 모델 출신답게 스타일에서는 늘 파격적인 스타일을 즐겼다.
1960년대에 오드리 햅번의 메이크업과 드레스 센스는 재빠르게 그녀를 모드-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영화 <아멜리아>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의 경우도 부모님이 오드리 햅번을 너무 좋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1964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주인공 엘리자 두리틀로 역으로 나온 오드리 햅번은 세실 비튼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통해 노래 실력을 뽐냈지만 정작 뮤지컬 영화인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는 크랭크인 될 때까지 뮤지컬 넘버를 익힐 시간이 없었고, 감독도 그녀의 노래실력을 믿지 못해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이 대신 불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숍 윈도우 신.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을 맡으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다시 자리 매김했다. 특히 이른 아침에 까만 선글라스와 블랙 드레스 차림의 여주인공 홀리 콜라이틀리가 상류층 남자를 만나면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 쇼윈도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모습은 아직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오드리 햅번의 노후의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전념하면서 보냈다. 1992년 기자회견에서 찍은 사진에서 유니세프 친선 대사인 그녀는 소말리아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녀가 주인공을 맡은 마지막 영화 중 한편인 1966년 영화 <백만달러의 사랑>에서 니콜 역할을 맡은 오드리 햅번.
로마에서 위베르 드 지방시가 디자인한 새로운 드레스 피팅을 하고 있는 오드리 햅번. 그녀는 디자이너에 대해 “그는 나에게 룩과 다정함과 실루엣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유명 사진 작가와 서점 직원으로 각각 나온 영화 <퍼니 페이스>에서 남자 배우 프레드 아스테어와 함께 나온 영화의 한 장면.
오드리 햅번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사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진에서는 그녀 특유의 청순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6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 모델 출신 영국 디자이너 마리 콴트의 의상을 입고 모델로 나선 오드리 햅번. 그녀도 배우가 되기 전 런던에서 패션 모델로 활동한 적이 있다.
1957년 영화 <하오의 연정>의 한 장면.
영화 <언제나 둘이서> 세트장에서 샌드 버킷과 아주 잘 어울리는 심플한 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밀짚모자를 입고 해변을 산책하는 오드리 햅번.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그녀의 상징이 된 벌통 헤어스타일과 트렌치코트를 입은 오드리 햅번. 원래 이 영화의 원작자는 마릴린 먼로의 캐스팅을 원했기 때문에 오드리 햅번 캐스팅 소식에 분노했다고. 결국 영화 속 주인공 홀리는 직업적인 콜걸이지만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성적 묘사가 생략되어 세련된 패션 감각과 청순하고 귀여운 매력이 돋보이는 햅번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 바다 사나이들이 입던 줄무늬 유니폼이나 영화 <빠삐용>에 등장하는 붉은색 줄무늬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브레통 니트를 입고 살인 미소를 짓고 있는 오드리 햅번.
1963년 영화 <샤레이드>에서 남자 주인공 캐리 그랜트와 함께 포즈를 취한 오드리 햅번.
영화 <전쟁과 평화> 세트장에서 오드리 햅번은 말괄량이 모습의 발레 슈즈를 선보였다.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낸 그녀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르헨이라는 곳에서 부상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출연은 했지만 전투 장면은 절대로 찍지 않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스틸 사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준 헤어스타일과 검은 색 긴 장갑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시켰다. 아직도 국내외 대중문화에서 ‘햅번 룩’을 차용한 캐릭터나 의상을 여전히 만날 수 있다.
영화 <언제나 둘이서>에서 버그-아이 선글라스를 쓰고 해수욕을 즐기는 오드리 햅번.
1957년 영화 <퍼니 페이스>에서 오드리 햅번은 비트족 서점 점원을 연기했다.
1964년 영화 <뜨거운 포옹>에서 지방시가 디자인한 복숭아 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오드리 햅번.
1968년 공항 패션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녀의 시그너처 중 하나인 헤드스카프는 매력적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허리에 굵은 벨트를 매는 스타일은 그녀 덕분에 스타를 꿈꾸는 아주 작은 신인 여배우와 동의어가 되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현란한 글래머러스를 선보인 오드리 햅번.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브랜드 이름을 넣은 최초의 PPL이 되었다. 영화에서 티파니는 부와 행복을 상징하는 영화 소품으로 사용되었고,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플래그십 스토어는 모든 여성이 꿈꾸는 상징적인 촬영 명소가 되었다.
1954년 영화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 사브리나 페어차일드의 캐릭터를 살린 블랙 유니폼을 입은 오드리 햅번. 영화에서 그녀가 입은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 불리며 유명해졌다. 특히 이 영화는 패션 디자이너가 스타에게 최초로 의상협찬을 시작한 영화의 효시다. 의상을 협찬한 지방시는 이후 광고 효과로 매출이 늘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은 블랙 드레스 역시 협찬했다고.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활동한 오드리 햅번. 50대 부터 사망 시까지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와 동거했으나 아이를 갖지 않고 영화계 은퇴 후 유니세프 대사로 인권 운동과 해외 봉사 활동에 참가해 제3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며 아동 인권 보호에 헌신했다.
오드리 햅번이 유니세프 홍보 대사로 활동할 때 노년에 짓는 오드리 햅번의 미소가 유명해졌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를 방문해 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은 훗날 명곡의 반열에 오른 주제곡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튕기면서 불러 화제가 되었다. 영화 속 사운드 트랙은 1962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곡상, 편곡상, 주제가상 등 음악부문 3관왕을 차지했다.
그녀는 골초로도 유명한데, 흡연으로 인한 결장암으로 1993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 준 긴 담배 파이프는 ‘햅번 파이프’로 불리며 유명해졌다. 또한 오드리 햅번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2001년 우표로 발행되었는데, 아들이 흡연 장면이 이미지에 좋지 않다고 발행 중단을 요청해 발행된 1,400장이 전량 회수되어 소각 처리되었는데 이중에서 30장이 빼돌려졌다는 소문이 있으며, 최근 경매에서 6억 7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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