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토크 |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2015-10-21

30주년을 맞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삶과 패션

지난 30년간 물과 바람, 불 그리고 태생적 탐미주의자로 살아온 디자이너 이상봉의 패션 코리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시원한 민머리에 동그란 뿔테 안경, 검은 망토와 수염으로 대표되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캐릭터는 대한민국 패션의 상징이자 아이콘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얻은 대중적인 인기는 국민 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을 안겨주었고, 한글을 패션으로 변주해 세계인에게 한글의 조형미를 알렸고, 영화배우 줄리에뜨 비노쉬부터 국민 요정 김연아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유명 스타들과 만들어낸 패션테인먼트는 패션 대중화에 일조했다.


여기에 패션 디자이너 데뷔 이후 줄곧 축구해온 ‘아트와의 만남’이라는 패션 담론은 그의 패션에 혁신적 미학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스페인 마오마오 출판사가 펴내는 <아틀라스 오브 패션 디자이너> 아트북에 소개되기도 했다. 아트북에는 혁신적인 디자이너로 선정된 60명의 대표적인 컬렉션과 일러스트레이션,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 유명한 칼 라거펠트, 마틴 마지엘라, 알렉산더 왕, 마틴 그랜트, 빅터&롤프 등이 소개됐다. 한국 디자이너로는 이상봉이 유일했다. 이상봉은 컨템포러리 대한민국 패션에서 최고의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담기는 대로, 흐르는 대로...


그는 1970년대 말 첫 사랑 연극과 헤어지고 운명적으로 패션을 만났다. 1980년대 전반전이 진짜 디자이너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면, 후반전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고 진짜 디자이너로 거듭났다. 1990년대는 SFAA컬렉션을 통해 아트와 만남이라는 패션쇼의 새로운 세상을 대중들에게 선보였고, 2000년대는 파리 컬렉션을 통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와 공유했다. 파리 진출 이후 그의 정체성 찾기는 글로벌 패션의 눈으로 한글과 굿판을 보게 만드는 혜안을 주었고, 권위주의를 내려놓으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37살 크리에이터로 거듭났다.


동료 디자이너인 루비나는 그를 “디자이너가 존경할 만한 디자이너”라고 말한다. 사실 그에 대한 후배 디자이너들의 존경심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특히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젊은 디자이너들과 막힘없이 토론하고 설득하는 모습은 그동안 불통의 권위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졌던 선배 디자이너들의 이미지를 한 번에 바꾸어 신구 화합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패션사진가 김용호는 이상봉에 대해 “유명해지고 나서도 초심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라고 평가했다. 지금도 그는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 만든 봉투모양 명함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20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가끔 자만에 빠지려고 할 때마다 명함을 꺼내 보고 명함을 만들던 초심을 되새긴다.


“나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라는 초심은 봉투 안에 쓰인 ‘행복하세요.’란 문구에 그대로 녹아있다. 좌절과 결핍 상태에서 시작된 패션 디자이너의 길이었기를 그의 30년 패션 인생은 부족함을 채우는 과정이자 상대적 열등감을 치유해가는 힐링 과정이었다. 남들보다 두발 이상 앞서가는 자신의 패션에 안티가 늘수록 그는 좌절보다는 도전을 택했고, 안정보다는 모험을 택했다.


패션의 변방에서 나고 자란 그가 2002년 파리컬렉션 진출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국내 패션계 반응은 싸늘했다.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디자이너의 해외 컬렉션 진출이 홍보용으로 평가 절하되거나 혹은 바위에 계란 치기라는 패배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우려와 시기를 뒤로 하고 파리를 약속의 땅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적인 전통 문화를 가장 서구적인 패션으로 변주해 나름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60년대 말 앙드레 김이 파리에 선보인 한류 패션이 한복의 본질에 충실한 1차원적인 접근이었다면 ‘바람의 옷’이라는 친사를 받으며 한복의 선을 강조했던 1900년대의 이영희는 2차원적인 접근이었다. 2000년 이후 이상봉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서구 패션에 접목하는 3차원적인 시도로 파리 패션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우리의 무속 신앙인 굿을 주제로 한 루브르 박물관 패션쇼는 그 단적인 예다. 그는 지금까지 파리 컬렉션을 통해 조각보, 단청, 돌담, 산수화, 소나무, 자수, 자개 등과 가장 한국적인 전통 문화를 패션으로 보여주었다. 그런 몸부림의 하나인 2006년 한글을 주제로 한 파리 컬렉션 역시 세계 패션계에서 ‘독창적이며 전혀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국민 디자이너 앙드레김 이후 그에게는 ‘국민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와 인기도 높아졌다. 인터넷 덕분에 국내는 물론 해외 초청 패션쇼에 가서도 그를 알아본 현지인들의 기념 촬영 공세에 그 스스로도 놀란다. 몇 번 그의 해외 초청 패션쇼를 동행 취재한 필자의 경험으로 봤을 때 아시아 패션에서 이상봉의 인기는 마치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 인기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대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기에 가끔 스타 대우를 받을 때면 스스로 민망해 한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갑자기 몰아친 인기 쓰나미는 때론 사생활과 디자인 활동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피하지 못할 바에야 스스로 즐기자 라는 마음이 생겨난 듯하다.


‘국민 디자이너’라는 타이틀과 선후배 패션 디자이너들이 투표로 뽑은 ‘패션 대통령’이란 타이틀에 때로는 부담도 느끼지만 이제는 한류 패션의 전도사로, 패션의 아름다움을 대중들에게 선물하는 아티스트로, 그리고 조각보나 단청, 한글과 같은 한민족의 전통 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민간 대사로서의 역할에 어느새 익숙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패션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스스로 물이자, 바람이고자 했다. 담기는 대로, 움직이는 대로 변화하지만 본질만은 변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출발한 동료 디자이너들이 스포트라이틀 받을 때도 그는 오버 페이스 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보를 계속했다. 인위적인 것도 부자유스러운 것도 싫어하는 그의 패션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 그 자체다. 하지만 물과 바람과 같은 그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보통 열정을 뜻하는 ‘빨강’은 디자이너 이상봉과 많이 닮아 있다. 이미 그의 패션쇼를 계속 봐온 사람이라면 블랙을 중심으로 한 무채색으로 담금질한 무위자연의 패션에 포인트로 들어간 '빨강'에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상봉 본인은 빨강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아트북을 만들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사심 없이 물 흐르듯이 바람 부는 대로 결 따라 컬렉션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오행 가운데 빨강은 ‘불’을 뜻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 등을 의미한다. 또한 옛 선조들은 붉은 빛의 황토로 집을 짓거나 붉은색 염료로 부적을 그려 붙이거나 궁궐이나 사찰 등의 단청에 붉은색을 사용하며 그것에 숨겨져 있는 ‘열정’을 늘 기억하고 싶었던 소망이 아닐까 한다. 그 정신이 이상봉에게 전염된 듯 하다.



그는 앞으로도 물과 바람이고 싶다고 말한다. 물처럼 자신의 디자인이 어디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으면 하는 바람이리라. 그는 나이가 들고 경륜이 쌓이면서 스스로를 물에 담는다. 어느 용기에나 담기고, 흐르고 옮겨 가면서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고여 있으면 썩는 게 물이다. 때문에 스스로 고여 있고 싶지 않다고 뜻일 것이다. 또한 패션을 처음에 시작할 때 그가 가장 많이 썼던 단어가 ‘자유’였다. 사상에 있어서의 자유, 편견에서의 자유, 디자인에서의 자유, 사랑에 있어서의 자유 등등 지금도 그 무한한 자유를 디자인하고 싶다는 이상봉은 불같은 열정과 물과 같은 포용력을 담은 바람이 되어 영혼이 하고 싶은 대로 결 따라 디자인하는 자연인 이상봉을 꿈꾼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는 "보자기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의 삶의 흔적이 스며있는 보자기는 어떤 모양의 물건을 담아도 그 물건에 맞게 어울리면서 자신과 맞추기 때문이란다. 보자기는 담기는 물건에 따라 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펼치면 한 장 천 보자기의 본질은 그대로다. 여기에 조각조각 천으로 이어진 모던한 조각보는 보자기가 가지는 유동성을 잘 말해준다. 그는 늘 물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에 영혼을 맡겼고 조각보처럼 넉넉한 품에 육신을 맡겼었다. 그래서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했고, 그것은 작품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테크노아트`에서 `샤머니즘`을 거쳐 이젠 `한글`에 이어 '단청'과 '조각보'로 달려가는 김치 냄새나는 이상봉의 정체성 찾기는 아직도 운명처럼 계속되고 있다.



좌절은 꿈을 먹고 자란다


이상봉은 1남4녀 중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상봉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말수도 적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동창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가 교실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제대로 기억 못할 존재였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은 소통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혼자만의 생활에 충실했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에는 뒷산이 있었는데 항상 집-> 학교-> 뒷산-> 집-> 이런 식으로 혼자 지내는데 익숙했다. 당연히 친구도 없는 스스로 왕따를 자초한 외톨이 소년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스스로 외톨이가 돼야 했던 그는 만성 피부병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비책을 찾을 수 없는 병증은 목욕탕마저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정환경도 숨이 막혔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투병 생활을 했고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원망의 대상이자 짐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중학교 시절엔 가출도 했다. 부산 영도다리 인근에 방도 구했는데,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영도다리에서 떨어져 죽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좌절한 시간이었다. 좀처럼 낫지 않는 피부병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를 괴롭혔다. 이 약 저 약이 듣지 않아, 여름이면 피부를 까맣게 태우는 선탠으로 허물을 벗기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이 방법이 효험이 있었는지 지금은 피부병이 모두 나았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훈장처럼 남아 팔과 몸에 노인네처럼 검버섯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보통 꿈은 초, 중, 고를 거칠 때마다 꿈이 바뀌는데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종교인이 되고 싶었고, 중학생 때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잠깐 꾸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대학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방송연예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는 그만 연극에 푹 빠지게 된다. 내성적인 그에게 연극은 내적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처음 접한 연극에서 소리를 뱉어내면서 몸 속 응어리가 밖으로 분출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을 경험하면서 점차 내성적인 성격이 교정되었다. 물론 지금은 디자이너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는 배우와 디자이너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1년에 2번씩 다른 삶, 다른 생각에 빠지다보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에게 패션은 넓은 의미의 연극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상봉은 원래 연극을 평생 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군에 입대한지 얼마 안 있어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외아들인 그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그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잠시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연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복학을 했지만 졸업이 다가오자 연극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오래 동안 준비한 첫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는 연극을 포기해 버렸다. 무대에 서면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움이 때문이었다. 결국 그 공연은 무산되었다.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어렵게 연극을 하던 시절 그는 생활비라도 벌어 보려고 동네에서 수선 집을 하는 친구에게 “이거하면 먹고는 사는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는 친구 대답에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다가 국제복장학원 입학 광고를 보게 된다. 알고 보니 그 학원은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그 건물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결정이 운명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그는 연극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외아들이 손에 물을 묻히는 것조차 끔찍이 경계했던 어머니가 어느 날 몰래 바느질 숙제를 하는 자식을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그는 더 이를 악 물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2년간 국제복장학원과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을 거쳐 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동상으로 입상한 후 기성복 매장에서 디자인 실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감수성과 철학이 담긴 옷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85년 자신의 이름을 건 이상봉(LIE SANG BONG) 브랜드로 명동에 매장을 열었다. 브랜드명에서 LEE가 LIE로 한 것은 오타가 아닌 의도적인 작명이었다. 영어식으로 표현한다면 앙드레 김 처럼 ‘상봉 리’가 맞겠지만 그는 한글 어순을 지키고 싶었다. 세계화라는 명제에 우리의 것을 간과하고 그들의 것에 맞춰가는 것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해기 때문이다. 그리고 ‘LEE’를 ‘LIE'로 쓰는 것은 남들과의 차별성 때문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성(姓)을 가지고 싶었다. 이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패션을 만들겠다는 청년 디자이너 이상봉의 다짐인 셈이다.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IMF는 그에게도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시켰다. 그가 생각한 하눅 디자이너가 살 길은 바로 ‘해 외시장 진출`이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예정된 런던 컬렉션 패션쇼를 포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후배 디자이너들과 파리 전시회에 참가했다. 눈물의 오더장이라 불리는 마약한 출발이었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바이어도 늘고 매출도 늘었다. 그렇게 199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파리 프레타 포르테 전시회에 참가하며 젊은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에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2002년에 나간 파리 컬렉션 데뷔 무대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당시 그는 욕심만큼이나 긴장도 극에 달했다고 한다. 첫 파리에서의 패션 쇼 준비로 몸이 지친데다 긴장까지 더해져 정신을 잃고 욕실에 쓰러져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당시 패션쇼의 피날레 장면을 자세히 보면 그가 다리를 절며 무대 인사를 하기 위해 나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패션 쇼를 마치고 관객이 쫙 빠져나간 빈 무대를 정리하면서 허무함도 느꼈다. 그날은 새벽 6시까지 밤을 꼬박 새워 술을 마시며 “난 왜 파리로 왔나, 내가 여기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런 시련의 시기를 지난 10년이 지난 지금 해외 바이어들을 만나며 체계적인 해외 진출을 하고 있다. 이젠 바이어들을 기다리지 않고 이쪽에서 먼저 바이어를 선별할 만큼 성장했다.


그는 패션을 시작하면서부터 드림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기성복 디자이너로 시작해서, 몇 살 때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해서 내 숍을 꾸미고, 또 몇 살 때는 세계 진출을 할 거야 라는 나름대로의 플랜을 짰었다. 그 플랜을 위해 도전을 했었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었다. 그렇게 패션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가졌던 꿈을 서서히 조금씩 설계하고 이뤄나갔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세계무대에 나가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는 꿈 자체를 아주 작은 꿈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큰 꿈을 만들어놓고 그 꿈 하나만 보고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일 년 뒤의 꿈, 이년 뒤의 꿈 이런 식으로 작은 꿈부터 큰 꿈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는 한 계단씩 오르며 자신의 드림 다이어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평생 꿈을 이뤄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는 많은 꿈을 이뤄보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것이 그의 꿈에 대한 철학이다.



전통 문화와 대중들과 소통하다


디자이너 이상봉을 떠올리면 한글 패션을 빼 놓을 수 없다. 세계 패션계에 한글을 소개한 것은 2006년이지만 처음 패션디자이너라는 길에 ‘도전’할 때부터 그는 우리 전통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1985년 데뷔 땐 백의민족을 주제로 했고, 다음 해 미국 전시에서는 모시를 사용했다. 1991년에는 전통 매듭과 대바구니 조직을 모티브로 가져왔다. 태생적으로 그는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2005년쯤에 모 매체의 패션 콘테스트가 있었을 때 그는 한문을 옷에 프린트해 대회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대회 이후에 문득 ‘한문이 아닌 한글을 쓰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았고 그 아쉬움은 바로 한글 패션으로 승화돠었다.


한글을 처음 패션에 도입하려고 했을 때 반대도 심했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나 지인들조차도 극구 말릴 정도였다. “한글이 촌스럽다” “대중의 관심이 별로 없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영어 도안을 쓰는 게 나을 거 같다” 등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글이 도안된 의상도 없었고 한글 보다는 영어를 우상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심지어 가장 한국적인 거리라고 불리는 인사동에서도 한글이 들어간 티셔츠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거부감이 심해 스트레스가 많았다. 대놓고 옷 위에 한글을 보여주는 게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직설적이라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알파벳이 잔뜩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무조건 한글은 촌스럽다고 느끼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은 이상봉식 오기가 발동했다.


그러던 중 한 프랑스인 친구로부터 “동양 문화는 다 비슷한 거 같은데, 한글만은 매우 독창적이고 뛰어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떻게 패션과 한글을 조화시킬까를 고민하다가 컴퓨터로 찍힌 서체보다는 사람이 직접 쓴 필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오랜 친구인 소리꾼 장사익과 화가 임옥상이 떠올랐다.


장사익은 간단한 안부조차 편지로 보내고, 임옥상 역시 연하장을 대신해 편지를 쓸 정도로 손 글씨를 즐기는 그의 절친 들이다. 늘 그랬듯이 습관처럼 이 둘을 편지를 꺼내 읽다가 그동안 그냥 스쳐갔던 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동양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한글 패션의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장사익의 글씨가 유연하게 흘러가는 물이라면 임옥상의 글은 에너지가 폭발하듯 넘치는 불의 느낌이었다. 흡수와 발산의 대조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자 그는 바로 전화를 걸어 두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고 편지 속 숨어있던 손 글씨를 옷에 담았다.



물처럼 흐르는 장사익의 손글씨와 촘촘한 임옥상의 손글씨는 패션으로 다시 태어나 2007년 2월 파리 컬렉션에 51벌의 의상으로 선보였다. 흘려 쓰듯 새긴 한글은 그가 디자인한 옷 위에서 새로운 빛을 발했다. 예상 외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선 아직도 막연하게 한국 역시 중국과 같은 한자를 쓴다고 알고 있는 외국인들이 그의 옷에 박힌 한국 고유의 문자 한글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탄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한다.


물론 그 역시 상업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처음 시도는 조심스러웠다. 2005년에 안감에 훈민정음을 살짝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6년 한ㆍ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로 후즈 넥스트 전시회에 패션쇼와 전시를 개최하면서 외국 디자이너 40명과 함께 한글 패션 전시회를 하면서 큰 감동을 느꼈고 그 때 자신감도 함께 얻었다. 그러나 한글 디자인으로 세간의 화제가 된 뒤 남들 생각과는 달리 잃은 것도 많았다. 명성은 얻었지만 아쉽게도 기존의 브랜드 매출 상승이나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가 대중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되자 몇몇 기존 VIP 고객들은 불만을 갖기도 했다. 여기에 30년 동안 쌓아온 디자이너로서의 노력이 오로지 ‘한글 디자인’ 하나로 압축될 때도 스스로 자괴감도 느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지금 그만의 시그너처 룩이 되어 한글이 다양한 생활 디자인으로 응용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고 대중들이 한글의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했다.



그 한글 패션을 전 국민이 본 것이 바로 2006년에 방송된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나간 지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무한도전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미디어의 힘이 세기는 센 모양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다양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없던 때라 그는 섭외를 받고는 출연을 망설였다. 하지만 지인이던 정준하의 소개로 김태호 PD와 다른 멤버들의 열정을 만나 보고 그 역시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해 보자는 용기를 얻었다.


지금도 무한도전 멤버들이 실제 패션쇼 무대에 섰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긴장과 떨림의 순간들로 기억된다. 사실 그는 자신이 나오는 방송이나 기사를 잘 안 보는데 무한도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송이 나간 후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젊은이가 무한도전을 얘기하며 다가올 때면 도전과 열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울러 패션은 어렵다는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깬 것 같아 보람도 느낀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은 대중과 시대와 호흡하는 것이다. 요즘 그의 디자인 철학은 ‘소통’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매일 오전 3~4부의 신문을 읽는 습관도 모두 소통을 위한 노력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등 모든 이슈를 담고 있는 신문은 그의 디자인과 사회가 소통할 수 있는 최적의 통로다.



이상봉의 무한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


패션 분야는 너무 치열한 곳이기에 오랜 생명력을 장담하기 힘든 동네다. 하지만 디자이너 이상봉에게는 예외인 것 같다. 날로 인지도는 높아 가고 갈수록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어쩌면 젊은 디자이너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력은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도 타산지석의 롤 모델이다.


그런 이상봉의 저력에는 디자이너로서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철저한 공부가 그 비결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디자이너란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 영역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호기심, 그리고 생각한 걸 현실로 옮길 줄 아는 직접적인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이그의 지론이다.



보통 많은 디자이너들이 “난 왜 이럴까?” 혹은 “왜 제자리에서만 맴맴 돌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런 이유에는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 부족과 이론적 공부 부족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열정은 죽은 열정에 불과하다. 철저한 공부와 꿈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행동만이 스스로의 영역에 확장과 진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한 분야에서 정체된 지식만으로는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투정 같은 고민으로 상황에 늘 끌려 다니기 보다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확장과 진화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 이상봉이 우리에게 던지는 현실적인 성공 메시지다.


화려한 상업적 성공 때문에 그의 30년간의 진지한 인내의 시간이 묻혀서는 안된다. 현재 이상봉은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국가 대표다. 육중한 부담감을 어깨에 지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험난한 무한도전을 즐기면서도 묵묵히 자신이 결정한 그의 길을 갈 것이다. 가시밭 같은 험한 길은 그를 인간적으로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고 디자인적으로도 진화하게 만들 것이다. 그 축적된 디자인 나이테만큼 앞으로 브랜드 ‘이상봉’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 된다.


언젠가 좋은 자질을 가진 후배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물려주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다니는 것이 최종적인 꿈이라고 말하는 이상봉 디자이너. 연극 무대에서 못다 이룬 꿈을 언젠가 이뤄보고 싶은 꿈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글을 포함한 전통 유산은 늘 도전 의식과 열정을 가져다주었기에 세종대왕에게 감사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상봉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세종대왕이 가졌을 무한도전의 열정을 떠올린다고 한다. 세계를 감동시키기 위한 이상봉의 꿈과 패션 코리아의 무한도전은 그와 함께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보하고 있다.


글 유재부 패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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