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2015-08-15 |
[광복70주년특집] 대한민국 패션의 결정적 순간 베스트 10
1945년 8월15일. 일제에서 해방된 한반도에는 외국인들과 미군의 주둔으로 양장이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사회가 안정화 되면서 개화기부터 시작된 복식의 서구화가 탄력을 받게 된다. 즉 해방 이전까지가 복식 변화는 틀을 바꾸는 조심스러운 개혁 시대였다면 광복 이후에는 형태를 만들어가는 유행 시대였다. 광복 이후 지난 70년 '대한민국 패션의 결정적 순간 베스트 10’을 선정했다.
올해로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 35년에서 해방된 대한민국 패션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한 지난한 행보였다. 하지만 그나마 초석을 다진 대한민국 패션은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부산에서 다시 수도 서울로 올라온 디자이너들은 폐허 속에서도 ‘동부틱’과 ‘남싸롱’이라 불리는 재래시장과 패션 1번지 명동을 중심으로 다시금 패션 코리아의 싹을 키워냈다. 60년대 중반 노라노의 첫 패션쇼와 앙드레김이라는 젊은 디자이너를 배출한 한국 패션은 70년대 들어 명동과 신촌, 종로 등에서 하이-엔드 패션의 시대를 준비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켜 스포츠 웨어가 유행했으며 스포츠 브랜드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레이어드 룩과 토탈 패션 경향이 확대되는 코디네이션 개념이 점차 그 힘을 발휘한다. 고양된 소비자들의 국제적인 마인드 덕분에 톰보이, 타임 , 데코 등 다양한 여성복 브랜드가 탄생하고 나산, 신원, 대현 등 여성복 전문기업들이 고속성장하면서 내셔널 여성복 시장이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아울러 80년대 중반이후 디자이너들의 단체인 한국패션협회와 SFAA, NWS가 탄생하면서 컬렉션 문화가 정착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90년 이후 많은 디자이너들이 해외 컬렉션에 진출했다. 뉴 밀레니엄인 2000년대 들어 서울패션위크가 탄생한 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여전히 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류 바람을 탄 K패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1. 해방의 기쁨과 백의민족
암울한 일제 치하 35년에서 벗어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제의 억압에 억눌려 살았던 백성들은 자유를 만끽하며 오랫동안 입지 못했던 한복과 치마저고리를 다시 꺼내 입기 시작했다. 따라서 해방 공간의 복식은 한복이 주류였다. 하지만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 한복이 주류였던 것에는 나름 사연이 있다.
“흰 옷을 입으시오! 흰 옷을 입으시오! 그래야 폭격을 면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여! 어떻게 하든지 이 곤란한 시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독립은 곧 옵니다.” 바로 2차 세계 대전의 종말에 가까워 올 때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흘러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 내용이었다. B29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도 나타나 금속성의 광음과 함께 긴장감을 주는 시절, 백의 민족인 한국 사람에게는 폭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방송이다. 물론 당시 라디오 보급률을 생각한다면 방송을 들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문이 발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 나가 한국인들의 흰 옷 착용은 발 달린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인들 까지 흰색 바지저고리를 준비했다가 공습 공보가 울리면 부리나케 갈아입었다고 한다. 이런 한국인들의 움직임에 골머리를 앓던 일본 순사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해 먹물을 넣은 물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흰 옷 입는 사람들에게 마구 발사했다. 흰 옷은 자주 세탁해야 함으로 비경제적이며 겨울에는 열을 흡수하지 않아 보온성이 낮다는 이유를 내세운 일제의 ‘흰 옷 안 입기’ 조치는 결국 한국인의 민족성과 단결심을 파괴하려는 시도로 밖에 볼 수 없었다. 학교에서조차 아동들을 통해 염색을 권장했다고 하니 패전을 앞둔 일본의 조급성을 읽을 수 있다.
2. 마카오 신사와 양장점의 탄생
1940년대 대부분 구제품에 의존했기 때문에 구제품 패션이 주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부유층 남성들은 외국산 직물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이들을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다. 부유층 부인들은 마카오 신사에 맞추기 위해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실루엣의 벨벳 스커트와 빅 코트로 멋을 내고 마카오 신사들과 함께 사교장과 댄스홀을 누볐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복을 입었으며 일 바지(일명 몸빼) 위에 저고리를 입기도 했다.
마카오 신사들 사이에는 미국 스타일인 T룩이 유행했다. 2차 세계 대전 후부터 시작된 T룩은 어깨가 넓고 깃이 가슴을 꽉 채울 만큼 커다란 재킷에 바지는 홀태바지인데 전체적으로 엉덩이와 넓적다리 부분이 헐렁하고 바짓부리는 점차 좁아지다가 아래로 단을 접어 입었다. 당시 T룩 스타일의 마카오 양복에 번쩍거리는 해군 단화를 신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다니는 모습은 어린이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마카오 양복은 어려운 국내 경기를 생각할 때 적절하지 않은 사치품으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카이젤 수염으로 유명한 김상돈 국회의원이 시민들을 계몽할 목적으로 메가폰을 들고 소리 높여 마카오 양복 착용 금지를 외칠 정도였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유행의 물결은 1940년대 후반에도 이어져 ‘로마에’라고 불리는 더블 브레스티드가 유행하여 가슴 포켓에 손수건을 꽂고 선글라스와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유행했는데 한국전쟁까지 이 스타일은 이어진다.
양복의 마카오 시대와 함께 또 하나의 변모된 모습은 바로 양복점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서울 본정동(지금의 충무로)에는 수많은 양복점들이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원래 라사점은 양복 옷감을 파는 도매상을 의미했는데, 당시에는 양복지가 귀할 뿐 아니라 외국에서 밀수로 흘러 들어오는 마카오 양복지의 수량도 적었다. 그래서 옷감을 딱 한 벌만 끊어 가게에 진열해 놓고 그것을 감으로 팔거나 혹은 맞춤 양복을 만들어 주면서 라사점은 양복점과 같은 개념으로 불렸다. 그 영향으로 얼마 전까지 주위에서 쉽게 ‘OO라사’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는 양복점을 볼 수 있었다. 마카오 양복과 더불어 슈사인 보이라 불리는 구두닦이 직업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3. 맞춤 양장점 시대 개막과 패션 1번지 명동의 부상
한국전쟁 중 피난지였던 대구, 부산 등지에서 소규모 양장점이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옷은 주로 양공주(미군 대상의 접대부)들을 상대로 했으며 보따리장수들이 양장점에서 잔뜩 옷을 사서 양공주들이 많은 곳에 가서 판매했기 때문에 주문 양이 날로 늘어갔다. 당시 유행하던 옷감은 유똥 소재로 블라우스와 드레스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옷감이 너무 흐느적거려 재단이나 바느질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스커트는 다리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타이트한 차이니즈 드레스 형태였고 유행하던 칼라 모양은 조그만 피터팬 칼라와 앞 요크에 좁은 턱으로 장식을 한 것이 많았다. 유똥 드레스나 타이트스커트의 주문으로 양장점들은 날로 번창했다. 그 영향으로 이때부터 남자 직공을 두기 시작했는데 남자들이 일을 하면서 능률이 많이 올랐다. 번창한 양장점인 경우 보통 10여명 정도의 봉제사를 두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들어가자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폐허가 된 서울 명동에는 부산, 대구 등 피난지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들면서 패션 1번지가 되었다. 일본 여성에 의해 서양복 제작법을 전수받은 평양 출신의 사람들은 남으로 피난을 내려왔다가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영새 업체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의류의 60%를 서울 평화시장에서 생산했다고 한다.
1950년대의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동대문 시장 옆에 위치한 패션 1번지 명동에 모여 있었다. 전문 모델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여배우 최은희, 노정희, 안나영, 윤인자, 김지미 등과 미스코리아 김미정, 가수 모니카, 무용수 김백초 등이 패션모델로 활동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함흥에서 서울로 내려왔다가 대구로 피난을 갔던 최경자 여사가 대구에서 경영하던 ‘국제양장사’라는 간판을 명동에 옮겨 달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경자 복장연구소’라는 먹으로 쓴 긴 나무 간판을 하나 더 달고 한국 패션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국제양장사는 노경희, 최은희, 김지미 등과 같은 배우와 나애심, 윤복희, 김씨스터즈 등과 같은 가수들이 무대 의상을 맞추는 단골집이 되면서 맞춤 시대가 시작되었고 소문을 듣고 일반인 단골도 늘어났다.
당시 명동의 유명 양잠점으로는 국제양장사, 송옥 양장점, 노라노, 아리사, 엘리제, 마드모아젤, 노블 양장점, 영광사, 한 양장점, 보그 양장사 등이 있었다. 특별히 디자이너라는 명칭이 없던 때였고 손님들도 의상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라 양장점 점원이나 주인들이 그려주는 디자인에 따라서, 아니면 외국 잡지에서 자신에 맞는 의상을 골라 옷을 맞춰 입었다. 양장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주문도 늘어났다. 결국 1950년대 중반부터는 명동의 선구적인 디자이너들로 인해 우리나라 패션 산업의 고급화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양장점에서는 겨울 코트의 경우 하루 평균 50벌 이상의 주문을 받았으며 30여명의 직공들이 함께 밤을 세워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코트 옷감은 거의 순모 낙타지로 영국제, 프랑스제 등 외국산이 대부분이어서 옷감의 질이 좋았다. 이와 같이 5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 패션의 선각자들이 이곳에서 양장 문화의 기초를 닦으면서 패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고 명동의 양장점은 날로 번창했다.
4. 국내 최초의 여성복 패션쇼
1956년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복 패션쇼가 열린다. 1956년 11월 29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 다이너스티룸. 젊은 작곡가 박춘석의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쇼 장에 울려 퍼진다. 원피스 코트 앙상블을 입은 모델들이 등장한다. 관객들은 숨죽인 채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집중한다. 2부에서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그해 최고 여배우상을 수상한 조미령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 모델들이 나란히 무대에 선다. 사회자가 “오늘의 주인공 디자이너 노라노!”를 외치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치며 축하 꽃다발을 주인공에게 건넨다.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8,15 해방 전까지만 해도 양장은 예술가나 연예인 등 소수의 신여성들만이 입었을 뿐 대중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당시 모던걸이라 불리던 신여성이 양장에 양산을 쓰고 거리에 나서면 많은 사람이 앞뒤로 막아서서 구경하는 바람에 이동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국 전쟁으로 유엔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고 구제품이 넘치자 여성들 사이에 양장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옷감이나 옷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제품이든 밀수품이든 외제 옷을 많이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53년 휴전 후 전후 사회가 안정화 모드로 접어들면서 품질은 낮았지만 옷감이 조금씩 시장에 나왔고 여성들의 미의식도 발전하면서 드디어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쇼가 열리는 배경이 되었다.
1956년은 한국 전쟁의 상처가 아주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옷감 품질이 형편없었다. 당시 김일환 상공부장관이 고려모직에 특별히 옷감을 짜도록 지시했고 그 샘플 옷감으로 노라노는 패션쇼 의상을 만들었다. 전문 모델이 없다보니 해프닝도 있었다. 연예인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모델들은 옷을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자신이 더 예쁘게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개인 소장 최고급 브로치나 목걸이를 맘대로 착용하는 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의상에 맞지 않는 액세서리를 함부로 착용하는 것을 막는 사람을 따로 둘 정도였다. 관객들도 옷보다는 미인 구경이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자보다 남자 관객이 더 많았다.
초기 패션쇼엔 고객 중에서 멋쟁이 여성을 모델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아 영화감독들이 신인 배우를 발굴하기 위해 패션쇼의 단골손님이 되기도 했다. 만약 패션쇼를 ‘옷만 보여주는 목적’에만 의미를 둔다면 첫 패션쇼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한복 연구가 석주선 여사가 1946년 8월 현재 남산드라마센터 옆에 있었던 국립박물관에서 제1회 의상 전시회를 열었다. 몇 개의 마네킹에 옷을 입히고 나머지는 벽에 압정으로 고정시켜 주로 어린이옷을 전시한 이 의상전은 바자회를 겸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어쨌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복 패션쇼는 당시 우리나라 패션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의 피폐함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 패션쇼에는 그해 소련에서 처음 발사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이름을 붙인 의상도 선보였다. 패션쇼에 선보인 의상들은 유똥 등의 한복 소재와 밀수로 유입된 옷감들이 대부분이었고 양장을 제대로 입을 줄 몰라 뒷단추를 뒤집어 입거나 스커트의 앞과 뒤를 바꿔서 입는 소동이 비일비재했다.
5. 스타 패션의 원조 윤복희와 미니 스커트 열풍
1960년대 패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수 윤복희와 미니스커트다. 1960년대는 TV의 보급으로 인해 국민들의 의식주의 일부분이었던 복식 문화를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인 패션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수로 활동 중이던 윤복희가 1967년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자 복식 문화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그녀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TV 방송에 나오면서 그녀가 입은 미니스커트가 눈길을 끌며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물론 여성이 허벅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반감도 있었지만 기성세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젊은 세대들에게는 반가운 패션이었다.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60년대부터 불어온 서구의 페미니즘과도 연관이 깊다. 당시 여성들은 활발한 사회 진출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제 가부장적인 유교 사회의 폐쇄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고픈 열망이 미니스커트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당시 미니스커트를 단순 유행이 아닌 여성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그동안 여성지나 양장점의 쇼룸을 통해 부분적으로 패션에 대한 정보를 얻던 소비자들은 TV라는 매체를 통해 선보인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를 전 국민이 동시에 보고 서로 따라 입기 시작한 것은 유행의 확장성 측면에서 보면 획기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스타 패션이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즘 공항 패션의 원조가 아닐까 한다. 1968년에는 미니스커트와 함께 롱부츠 역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한국 여성들에게 미디어릃 통한 최신 패션 정보 수집은 패션에 대한 구체적인 욕구가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해외 디자인이 국내에 신속하게 소개됨으로써 패션에서의 유행 시기 역시 해외와 비슷한 흐름을 가고 있었다.
한편 윤복희가 가냘픈 몸매에 초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TV나 신문 지상에 연일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미니 열풍이 전국을 뒤덮자 매스컴들은 사회 유명인사와 남녀들의 의견을 빌어 찬반 논쟁을 벌였고 미니스커트의 무릎 위 길이에 대한 공방전이 미디어를 통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1965년부터 명동 양장점에서 서서히 선보인 미니스커트는 감추는 것에 익숙했던 한국 여성들의 옷 입는 방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남성들의 미니에 대한 호감을 대단해 영화 속에서도 육교 아래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을 보는 짓궂은 남자들이 그려지기도 했다.
길이로는 경제적이고 스타일로는 진취적이고 섹시한 미니스커트는 그 유행 시기가 가장 길었던 옷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니스커트는 1968년에 최고의 절정기를 보이며 무릎 위 30cm까지 올라갔고 심지어 마이크로미니라 불리는 초미니 스커트도 등장했고 핫팬츠도 함께 유행했다. 특히 미국의 젊은 대통령 캐네디 대통령이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면서 스커트 길이도 따라 올라갔다는 점은 패션이 결코 사화 현상이나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경제가 나쁘면 원단을 아끼기 위해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미니스커트 효과도 등장했다. 미니스커트 유행과 함께 목이 긴 부츠가 유행했다.
옷감에 대한 유행 추세도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오랫동안 여성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면서 꽃무늬 같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기하학적 문양의 추상화 취향이 두드러져 화려한 예술적 패션 탐닉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옵아트의 유행은 국내 여성복 블라우스나 원피스 등의 아이템에 프린트로 등장해 세계 패션 흐름과 보조를 맞추었다.
6. 정부의 미니스커트와 장발 통제
1970년대 초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인해 대학생들의 반정부적인 태도가 강했고 정부 역시 젊은 세대 패션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어서 다양한 통제가 일어난다. 1971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히피족에 대한 TV 방송 출연 금지를 지시하는 등 매스 미디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패션의 경우 스커트 길이가 무릎 위 30cm 이상까지 올라간 대담한 마이크로 미니가 등장하자 풍속 사범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미니스커트와 마이크로스커트의 경우 무릎 위 17cm 이상은 경범죄로 처벌했다. 이에 따라 경찰들은 자를 들고 다니면서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는 단속하는 웃기는 풍경이 벌어졌다.
남자 대학생들의 경우는 히피의 영향으로 귀를 접을 정도의 장발로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것 또한 단속 대상이 되어 1970년에 거리에서 장발 단속에 걸리면 머리 중앙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간 듯한 삭발이 진행되었고 1973년에는 전국적으로 장발족을 단속했다.
특히 패션을 사치의 온상으로 보는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와 더불어 패션에 대한 억압을 시도해 자연히 패션계도 위축이 되었다. 유신 정국으로 인해 TV 방송에서의 패션 쇼 중계는 불허되었고 호텔에서 열리는 패션쇼도 제한을 받았다. 사회 정화차원의 출구전략이 필요할 때마다 박정희 정부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세무 사찰을 받은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한편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진과 티셔츠가 인기를 끌면서 패션업계에서는 캐주얼웨어 붐이 일었고 백화점들도 기성복 판매 이외에 진을 담당하는 전속 디자이너를 두고 판매 경쟁에 뛰어 들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진은 맥주와 기타와 함께 70년대 캠퍼스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맨 모습이나 민속 의상에서 유래한 판초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어디서든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청바지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상징한다.”는 맥루한의 말처럼 한때 청바지는 반체제적인 의미를 내포하기는 했지만 그 실용성은 70년대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본 패션으로 애용되면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유행은 오직 블루진이라고 할 정도로 그 인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7. 국내 디자이너들의 해외 컬렉션 진출
1992년 한국인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해외 컬렉션에 참가한 이신우, 이영희가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후 1993년 진태옥, 1995년 홍미화가 참가했다. 이후 국내 디자이너들의 꾸준한 해외 컬렉션 참가해 1998년에는 설윤형, 한혜자, 김동순, 지춘희, 박윤수 등 디자이너 5명이 뉴욕 컬렉션에 참가했고 1999년에는 문영희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다.
해외에 진출한 디자이너들은 초기에 주로 ‘한국적인 선’으로 외국 시장을 두드렸으며 외국 유명 신문과 패션 잡지에 이미지 광고를 내거나 현지 쇼룸 입점이나 단독 매장 오픈을 통해 이름 알리기에도 적극적이었고 바잉을 위한 수주 노력도 경주해 나름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이랜드와 보끄레머천다이징을 비록한 국내 내셔널 브랜드들도 일본과 중국 등지로 진출하며 글로벌 전략을 구사했다.
한편 1990년에 결성된 SFAA는 그해 가을 91 봄/여름 SFAA 컬렉션을 시작으로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제대로 된 컬렉션 시대를 열었다. SFAA는 이후 패션의 대중화를 추구하면서 한국의 트렌드를 제시하고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SFAA 컬렉션 이후 타 패션 그룹인 KFDA와 JDG도 이전의 관행에서 벗어나 미리 트렌드를 제시하는 컬렉션으로 전환했다. 1992년에는 제3세대라 불리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NWS가 젊고 창의적인 새로운 컨셉의 뉴웨이브인 서을 컬렉션을 열면서 컬렉션 정착에 일조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기존의 고가로 책정된 특정 고소득층을 겨냥한 판매 전략에서 벗어나 실질적 판매율을 높이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전략으로 소비자층의 연령대를 낮추고 가격대를 저렴하게 조정한 상품 군들을 세컨드 브랜드로 내놓고 수익 창출을 도모하기도 했다.
8. X 세대와 스타 패션
1990년의 마케팅 특징은 세대별 차별 마케팅을 본격화했다는 점이다. 먼저 틀을 거부하는 오렌지족으로 불리는 X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혼처럼 살아가는 신세대 주부인 미시족이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급부상하면서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틈새시장이 생겨났다. 즉 20대를 겨냥한 의류 시장 뿐 아니라 미시 캐주얼 시장이 부상했고 기혼 성인 여성을 위한 차별화된 브랜드가 주목을 받았다. 또한 ‘N세대’ 혹은 ‘1318세대’로 불리는 10대를 위한 시장이 패션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우리나라 가요계나 패션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서태지가 부른 노래는 물론 그가 입은 옷은 곧 그의 팬들이 사 입고 싶은 옷이 되었다. 스타 마케팅이 시작된 셈이다. 소위 스타 마케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자신이 입은 의류 브랜드를 하루아침에 인기 브랜드로 만들어 낸 서태지의 영향으로 패션계 마케팅에는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패션 마케팅에서 연예인들의 비중이 높아가면서 가수나 배우, 탤런트 등 소위 뜨는 스타가 입은 옷들은 ‘OO패션’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어 ‘인기 연예인=최첨단 유행 아이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1996년 1집을 낸 HOT에게 의상을 협찬한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유명 브랜드가 되었고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사회적으로 주목을 끄는 사람이 입은 특정 의복이나 소품들은 단시간 고객들의 모방 심리를 자극했다. 이러한 트렌드는 결국 ‘스타 패션 따라잡기’라는 새로운 마케팅 툴로 진화하게 된다.
한 예로 1996년 문화방송에서 방송된 <애인>이라는 드라마는 애인 신드롬을 만들어 내면서 주목을 받았는데 드라마 속에서 여주인공이 착용한 액세서리나 남자 주인공이 입은 블루 와이셔츠는 당시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 정도 가지고 있는 머스트 바이 아이템이었다.
9. 패션 타운으로 변신한 동대문 시장
1990년대에 명동이 전통적인 패션 1번지로 새롭게 힘을 얻었고 ‘로데오 거리’가 있는 압구정동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와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이 밀접한 청담동이 자리를 잡은 이후 새롭게 떠오른 상권이 바로 동대문이었다. 주로 도매 위주로 운용되던 동대문 시장이 두타, 밀리오레와 같은 24시간 소매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외국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1998년 동대문에 점포수 2000개 이상의 백화점 형 쇼핑몰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동대문 의류 시장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가운데 ‘동대문 패션 타운’ 이라는 신 소비 시장의 형태를 이루면서 국제적 패션 관광 명소가 되어 국내외의 엄청난 수의 패션 소비자를 유입하고 있다.
동대문 시장은 디자이너들과 상인들에게는 성공의 기회를, 국내외 관광객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밤에도 쇼핑할 수 있다’는 편의성을, 외국 상인들에게는 원하는 상품을 2~3일 내에 납품받을 수 있다는 이점을 제공하며 호응을 얻었다. 아울러 백화점 수준의 쾌적한 쇼핑 공간관 카드 결제를 포함한 서비스까지 선보여 소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동대문 시장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국제적인 패션쇼나 유명 국내 브랜드 의류를 재빨리 벤치마킹해 비슷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 가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싸고 다양한 상품과 2~3일이면 납품 가능한 초스피드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 때문에 국내외 상인들이 동대문 패션 타운을 계속 찾게 만든다.
10. 한국 패션의 성공적 해외 진출
1990년대 한국 디자이너들의 해외 컬렉션 참가를 시작으로 2000년대에는 해외 현지 법인을 설립하거나 쇼룸 입점과 직매장 오픈 등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모색하면서 젊은 디자이너들의 해외 패션 위크와 트레이드 쇼 진출이 대폭 늘어났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2002년부터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으며 2009년에는 뉴욕에 법인을 설립하고 쇼룸을 오픈했으며 2013년부터는 파리를 떠나 뉴욕 컬렉션에 참가하고 있으며 2015년 뉴욕 직영 매장 오픈했다. 남성복 디자이너 우영미는 2002년부터 파리 남성복 컬렉션에 참가해 2006년에는 파리에 단독 매장을 오픈했다. 정욱준도 2008년 파리 남성복 컬렉션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으며 박춘무, 손정완, 계한희, 이석태, 최범석, 이주영, 고태용, 강동준, 이지연 등이 뉴욕 컬렉션에, 문영희가 파리 컬렉션에, 최유돈, 허환, 이지선 등이 런던 컬렉션에 각각 참가하고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 뿐 아니라 내셔널 브랜드들의 해외 진출도 활발했다. 2001년 MF, ONG, 오브제, 데코, 시스템을 시작으로 온앤온, 더불유닷, 올리브대올리브, 쿠아, 에린 브리니에, 탱커스, 매긴나잇브릿지, 써스데이아일랜드 등의 내셔널 브랜드들이 레드 오션인 내수 시장을 떠나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참고 자료= 한국패션협회 30년사>
글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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