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토크 | 패션 40주년 맞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 2015-08-31 |
“나는 여전히 제일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올해로 81세인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40년 패션 인생 동안 남다른 재능과 비전을 통해 전 세계 500개 매장에 자산 규모 9조 4,160억 원의 아르마니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첫 자서전에서 발췌한 라벨 뒤에 숨어있었던 아르마니의 삶과 작업을 통해 그의 남다른 통찰력을 정리해 본다.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은 아르마니 제국을 이끌고 있는 올해 81세의 패션 카이저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성공을 통해 그 누구도 넘기 힘든 세계 패션계의 레전드로 남아 아직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아르마니 제국은 전 세계에 걸쳐 500 여개 매장을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얼리, 안경, 홈웨어, 향수, 호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초콜릿 판매와 꽃집은 물론이고 여기에 오뜨 꾸띄르부터 데님, 아동복, 액티브웨어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의류라인을 전개하고 있다.
그야말로 멀티 패션 제국이다. 그러나 40년 동안 그는 거의 매체와의 인터뷰를 하지 않았으며 초지일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로만 대화한다. 따라서 이 체구 작은 네이비 복장을 한 슈퍼 톤 스타일의 패션 거장과 겨우 인터뷰를 하게 되는 인터뷰어는 인터뷰를 위해 언어를 다시 공부하거나 아니면 통역을 통해 인터뷰해야 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재산 규모는 현재 약 80억 달러(약 9조 4,16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의 성공과 선견지명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 걸친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럭셔리 브랜드를 위한 길을 닦았으며, 반면에 그의 테일러링과 미니멀리즘 미학에 대한 모던하고 나른한 접근은 패션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리차드 기어가 그의 옷을 입은 후 그는 할리우드와 중요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레드 카펫의 셀러브리티들을 위해 옷을 만드는 단순한 의상 제작자가 아닌 패션 하우스 개념을 주도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쇼킹’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그의 최근 2015 가을/겨울 파리 오뜨 꾸띄르 컬렉션은 비록 우아하고 날카로운 테일러링과 조용하게 박수갈채를 받은 가운(깃털과 장식 조각이 돋보였다)과 같은 그의 디자인 시그너처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크시아가 만발한 런웨이는 펑크에 대한 송시였다.
그는 패션 연대기를 위해 새로운 재료를 계속 생산하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의 첫 자서전에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자신을 한껏 낮추었다. 아울러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지속적인 성과에 대한 생각도 드러냈다. 이제부터 그의 자서전을 요약해서 구어체로 소개하도록 한다.
자신을 묘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습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80세가 되면 더 이상 연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몇 가지의 중요 포인트를 적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외면 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비록 내가 진화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고 해도, 나에게 편안하게 나의 장점과 단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장의 진정한 의미는 현실의 불완전한 것에서 완벽한 아이디어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비록 평생이 걸릴지 모르지만 결국 당신은 성공할 것입니다. 예를들어 나는 여러 해에 걸쳐 배운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비타협성을 톤 다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아주 엄격합니다. 심지어 내 주위의 사람들보다 더욱 더 엄격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종종, 나는 협력자 혹은 외부 세계와 같은 일을 논의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은 재량에 대한 나의 과도한 감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나의 금욕적인 중산층의 도덕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의 개인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것은 나를 질투로부터 보호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아첨하거나 혹은 성공에 안주함에따라 나의 명예가 지속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많지만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성공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출발점입니다.
나는 도전을 통한 성공을 그 무엇보다 사랑합니다. 이것은 단지 더 많은 소득을 올려주기 때문도 아니고 명예에 대한 굶주림 때문도 아닙니다. 도전은 늘 나에게 젊음을 유지하면서 세계를 진화시키는 방법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젊음은 시대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단할 때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일상적 현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나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패션을 시작한 아주 초기부터 나는 특권층 여성들을 위해 놀라운 옷만을 생각하는 자신만의 상아탑 안에 갇혀 있는 패션 디자이너의 낡은 모습을 거부했습니다. 나는 실제 여성과 남성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엠포리오 아르마니를 통해 실제 젊은이들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나는 젊은이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옷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패션을 창조하는 것은 단지 옷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패션은 태도를 실험하고, 새로운 관점에 적응하는 워크숍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곧 일어날, 나보다 앞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발명이 가능하다는 비전의 다양한 관점과 폭을 유지하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항상 일관성이 있습니다. 재킷을 디자인하거나 혹은 호텔 인테리어를 구상하는 것은 같은 세계의 다른 측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현명한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낍니다. 나는 집중하고 제어했습니다. 그러나 냉담함 뒤에는 다혈질과 예민한 성격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배웠으며 그렇치 않았으면 세상은 나를 이용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성적이고 삼가하는 편입니다. 나는 항상 파티나 사교 모임보다 나의 스튜디오를 더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나는 지금까지 여전히 아침에 작업실에 제일 먼저 도착해 밤에 제일 마지막으로 퇴근합니다.
나는 내 작업의 필수불가결한 수행적 측면에 의해 압도되지 않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일부분 냉담한 존재로 해석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주의로 나 자신을 둘러싸야 합니다. 역할이 다른 사람들, 수줍음의 형태로 여전히 다른 사람들. 후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석입니다.
<1987년 조르지오 아르마니 캠페인의 모델 지나 디 버나도. 1980년대 중반부터 아르마니는 피워풀한 페미닌 머스큐린 테일러링을 구축했다>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아르마니 의상을 입은 리차드 기어>
<1944년에 아르마니가 형 세르지오와 여동생 로산나 그리고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클래식 블레이저와 핀 턱 웨이브를 입은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1995년 가을/겨울 캠페인>
<아르마니의 아버지, 여동생, 그리고 그가 우아하다고 묘시한 어머니. 아르마니는 “엄마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고 말한다.>
<1951년에 찍은 세르지오, 조르지오 그리고 우고 아르마니. 조르지오의 고인이 된 두 형제의 딸과 아들은 현재 아르마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의과대학에서 3년을 공부한 후, 아르마니는 시에나에서 3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했다>
<1978년 밀라노에 있는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아르마니의 창업 비즈니스 파트너인 세르지오 갈레오티와 아르마니>
<부드러운 이브닝 웨어를 다룬 1988 봄/여름 캠페인. 1980년대 말 아르마니는 미셸 파이퍼나 조디 포스터와 같은 배우들에게 옷을 입혔다>
<앰포리오 아르마니의 1992년 봄/여름 캠페인>
<참고 서적= 조르지오 아르마나 by 조르지오 아르마니/리졸리 출판사/2015>
패션엔 유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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