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칼럼 2014-07-16

''패션계의 거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프랑스에서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를 클래식하고 혁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압도한 영화 <이브 생 로랑>이 개봉 5일 만에 누적 관객수 1만 명을 돌파하는 폭발적 흥행 저력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여름 극장가를 클래식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그의 성공 스토리를 마스터하시길...




전설적인 록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 리가 태어난 1936년에 그는 알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7세인 1953<보그> 프랑스판의 에디터 소개로 디올의 수제가가 되었고, 19세 때에는 국제 양모 사무국에서 개최한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드레스 부문 1등을 수상했습니다. 참고로 함께 출전한 칼 라거펠트는 코트 부문 1위를 차지했답니다.

 

이후 21세 때에는 스승인 크리스찬 디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1년 후인 1958년 성공적인 그의 첫 디올 컬렉션으로 일망 촉망받는 신인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퓌조 라인과 해방 라인을 선택해 둘을 A라인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트라페즈 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미국애서 1947년 뉴룩 이후로 여성복에 있어 가장 큰 변화라는 극찬을 받았고 윈저 공작부인은 크게 감동을 받아 컬렉션 전체를 구입했으며 프랑스 신문은 헤드라인으로 그가 프랑스를 구원했다며 대서특필했습니다.

 

1966년 그는 혁명적인 이브닝 웨어 르 스모킹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행사를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하였는데, 그는 1930년대 여배우 마들렌 디트리히의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새로운 이브닝웨어로 제안했습니다.

 

여성의 몸에 꼭 맞는 긴 재킷, 일자로 떨어지는 바지와 주름 장식인 자보(jabot)가 달린 오건디(organdy) 소재의 셔츠, 헐렁거리는 넥타이, 실크 새틴의 벨트로 구성된 르 스모킹은 성의 혁명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에 꼭 맞는 혁명적인 의상이었습니다.

 

그는 르 스모킹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고 1966년 이래 2002년 은퇴할 때까지 매 시즌 새로운 스타일을 소개하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습니다. 이후 1967년에 선보인 핀 스트라이프 무늬의 팬츠 슈트는 여성복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으며, 여성의 파워를 드러내는 주요한 의상으로 1970년대를 풍미했습니다.



 

시대를 읽고 새로운 여성상에 맞는 혁명적인 옷을 선보인 것 이외에 1960~70년대 그의 또 다른 테마는 다문화주의였습니다. 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인 그는 다른 파리 출신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비서구권의 문화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고, 이국적인 풍경, 색채감, 문화, 전통 의상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그의 독창적이고 천부적인 컬러 감각과 함께 다채로운 컬렉션을 탄생시켰습니다. 1967년 그는 아프리카 밤바라 족의 예술 작품과 민속 의상에 영감을 받은 아프리칸 컬렉션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1976년 발표한 러시안 룩은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뉴욕 타임스>는 이 컬렉션을 세계적 패션의 미래를 바꿀 혁명적인 컬렉션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누빔 재킷, 페전트 블라우스, 긴 스커트 등 러시아와 모로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통 의상이 오렌지, 핑크, 보라색, 노란색, 그린, 빨강색과 같은 강렬한 컬러와 함께 새로 창조되어 화려함을 더했고 그에게 20세기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훌륭한 색채 감각을 지녔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컬렉션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컬렉션으로 꼽기도 하였답니다. 이 밖에도 그는 옷을 통해 스페인, 고대 중국, 페루, 모로코, 중앙아프리카, 몽골, 터키, 베네치아의 전통 의상과 문화를 소개하였고, 1960년대 후반, 70년대 에스닉 룩의 유행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흑인 모델을 패션쇼 무대에 처음 올린 최초의 서양 디자이너이자 시스루 블라우스를 패션쇼에 올린 최초의 디자이너였습니다.

 

또한 생존해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며 10억의 세계인이 주목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회 결승전에서 전 세계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에 시작되기 전까지 300명의 모델이 등장하는 세계 최초의 축구장 패션쇼도 열었습니다. 그는 바로 ‘20세기 패션의 전설이자 모드의 제왕으로 불리던 거장 이브 생 로랑입니다.

 

그는 지난 20021765세의 나이에 돌연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덕분에 122일에 열린 2002 /여름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그의 40주년 축하 패션쇼이자 고별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자 회견장의 그에게서는 첫 디올 컬렉션을 끝내고 환호하는 팬들을 피해 발코니로 도망갔던 수줍은 많던 스물 두 살 청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수줍어하는 본성만 그대로일 뿐 50년 가까운 세월을 패션과 함께 해온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마치 세계 패션의 여사가 아로 새겨진 나이테로 보였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은퇴 이유는 고문처럼 톰 포드와의 불화설이나 쿠튀르 라인 매출 저조로 인한 구찌 그룹의 강제 퇴출이 아닌 건강상의 문제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여든이 훨씬 넘어서도 디자인한 코코 샤넬에 비추얼 볼 때 그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은퇴를 선언한지 3일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상업적인 감각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유럽 하우스를 이끌어가는 패션 흐름과 오트 쿠틔르를 평가 절하하는 패션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퇴 선언 기자 회견에서 언론의 예상과 달리 후계자(당시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를 지목하지 않은 그는 나는 패션을 통한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의 환상을 거부합니다.”라는 말로 톰 포드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톰 포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의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는 그는 잡지를 보지 않기 때문에 톰 포드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았으며 사실 관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톰 포드가 이브 생 로랑을 맡은 후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가죽 제품과 신발 등 액세서리 라인의 호조로 매출이 전년 대비 178퍼센트나 신장했다고 하니 이브 생 로랑의 심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테니스 경기에 생 로랑은 지쳐버린 것 같습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고 라켓을 놓아버렸습니다.”라는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의 말처럼 경쟁자가 없는 패션계에서 노장 혼자 쿠튀르의 영광을 살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결국 그의 은퇴로 오트 쿠티르는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나온 다양한 실루엣은 이브 생 로랑과 같은 쿠티리에들의 실험적인 시도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뉴욕 컬렉션의 지나친 상업성으로 인해 컬렉션이 점점 재미가 없어진다는 비판이 나오는 시점에서의 은퇴라서 그런지 그의 빈자리는 커 보였습니다.

 

어쨌든 22일 오트 쿠튀르 컬렉션으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쇼를 마치고 쿠티리에 이브 생 로랑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톰 포드와 같은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이 너무 상업성에 치우쳐 자신과 같은 노장 쿠튀리에의 예술성을 등한시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톰 포드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었고 은퇴 기자 회견 후 톰 포드가 밝힌 것처럼 이브 생 로랑이 쿠튀르를 통해 평생 이루어 놓은 아카이브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입니다.

 

결국 은퇴한지 6년 후인 200865, 뇌종양으로 사망한 이브 생 로랑의 장례식이 열린 파리 생로슈(Saint Roch) 교회에는 크리스챤 라크르와, 장 폴 고티에, 발렌티노, 존 갈리아노 등 수많은 디자이너를 비롯해 사르코지 대통령과 카를라 부르니 내외까지 참석해 그를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쓸쓸한 죽음을 맞은 코코 샤넬과 달리 이브 생 로랑은 프랑스의 국민 디자이너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이승과의 아쉬운 작별을 고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보여준 눈물만큼이나 프랑스인들은 그를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Yves the Dauphin)라고 칭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해 기성복 라인을 런칭하고 여성에게 바지를 입히는 등, 사회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새로운 패션을 제시한 혁명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국의 문화, 문학, 예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매 시즌 선보이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20세기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탁월한 색채 감각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생 우울증,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연약한 사람이었던 이브 생 로랑은 시대를 읽는 눈과 놀라운 창조력으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전설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요즘 극장가에서는 불멸의 패션 아이콘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사랑,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이브 생 로랑>이 지난 개봉되어 뜨거운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2014년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프랑스에서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를 클래식하고 혁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압도한 영화 <이브 생 로랑>이 개봉 5일 만에 누적 관객수 1만 명을 돌파하는 등 폭발적 흥행 저력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여름 극장가를 클래식한 패션 미학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인기는 너무 상업적으로 변질된 요즘 세계 패션의 미학 실종에 대한 고급(?) 소비자들의 반대급부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의적인 아티스트보다는 상업적인 크리에이터가 주목받는 현실에서 새로운 스타 탄생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이브 생 로랑은 20세기 패션의 살아있는 전설이니까요

 


어쨌든 그는 후배들에게 밀렸든(?), 아니면 스스로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전격 은퇴라는 조커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가라질 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처럼 거장 이브 생 로랑은 21세기 패션이 원한다면 코코 샤넬이나 마이클 조던처럼 기꺼이 컴백을 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만 지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한 때 경쟁자였던 칼 라거펠트의 활약상을 보면 여전히 그가 그립습니다. 에디 슬리만이 이브 생 로랑 브랜드을 맡으면서 이브 조차 날아가 버리고 생 로랑이 되어 버렸고 오트 쿠튀르에서 종적을 감춘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빈자리를 채워 나가기 위한, ‘새로움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세계 패션계의 혁신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과제는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지암바티스타 발리, 빅터&롤프와 같은 예술적 감성을 갖춘 젊은 디자이너들의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오트 쿠튀르에서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패션엔 유재부 기자

fashionn@fashion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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